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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청년 루카치가 말했던, 우리의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이 하늘에 빛나는 별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속성이라서 창공의 별들을 보고 우리가 어디쯤 왔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알았던 그런 시대가 정말로 우리에게 있었을까. 영혼, 빛나는 별,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는 아름다운 말들이 너무나도 아득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나는 여러 번 좌표를 잃었던 것 같다. 한국 사회와 대학은 내가 어떤 연구를 하길 원하는 것인지, 나에게 과연 ‘스승’이 되길 기대는 하는지, 나는 여러 번 고민하고 좌절하기도 했다. 숨 막힐 듯한 위계질서는 교수 간, 교수와 학생 간의 자유로운 토론을 상상하기 어렵게 했다. 연구 활동에 ‘실적’이라는 단어가 적용돼 여러 달 여러 해를 고민해 완성한 논문들이 단순한 숫자로 표기되고 이 숫자들이 곧 대학 서열매기기에 사용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낯섦은 지금 돌아보면 시작에 불과했다. 학생들은 까다로운 ‘고객’이라고 숙지되고, 전국의 대학들이 이러한 고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들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대학은 그리고 사회는 애초부터 내가 ‘스승’으로 성장해나가길 바라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대학에 막 임용돼 시작한 교양수업에서 한 학생은 나에게 ‘순진하다’는 강의평가를 했다. 이 수업은 학생들이 사회문제에 대해 조사하고 서로 토론하며 해결방안을 함께 고안하는 것이 과제였는데 경쟁체제에 익숙한 학생들은 이러한 팀 활동을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1~2점의 성적보다 함께 고민하고 해결방안을 찾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그 학생은 “우리의 인생은 소수점 1~2점으로 갈리는데 교수님은 현실도 모르고 공생을 말하니 참 순진하다”는 평가를 남겼다. 학생들이 배를 곯는 사람들에 대해 애통함을 느끼고 지성인으로 성장하도록 영혼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꿈꾸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을까. 최근 가장 섬뜩했던 것은 연구결과에 따라 판단하고, 믿는 바를 발언하고, 주장을 펼칠 때 나도 모르게 자기검열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을 때였다. 나의 ‘조교수’ 직위가 유독 불안정하게 느껴지고 정체 모를 누군가로부터 ‘찍힐 수 있다’는 의구심을 언제부터 가지게 됐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다만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가치관과 사상, 그리고 이념과 관련된 자유로운 지식활동이 충분히 보장되고 있지 않다는 점은 갈수록 실감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의 존재 이유, 그리고 지식인, 지성인, 교육, 연구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고민 없이 우리 모두 어디론가 끊임없이 마냥 질주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원하고 우리 사회에 필요한 대학의 모습이 세계 대학 랭킹에 하나라도 더 진입시키고, 연구실적을 높여서 연구비·사업비 수주를 늘리고, 학생들의 ‘스펙쌓기’에 기여해 어디든 취업시키는 것이라면 그 다음 장의 이야기는 무엇일지 궁금하다. 사회적 불의를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는 이웃들에 대해 양심을 느낄 수 있는 지성인이 더 이상 길러지지 않고, 창의적인 연구를 진행하면서 다양한 의견을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지식인들이 죽어간다면 우리 사회는 풍요로워져도 행복하지는 못할 것 같다.

다행히도, 모든 것이 멈추어 있을 때야 들리는 저음의 파동처럼, 나는 사회의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연구자들과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열정을 불태우는 시민사회 운동가, 사회복지사, 자원봉사자 그리고 개인들이 만들어내는 미세하지만 강인한 물줄기들을 만나게 됐다. 고요하고 따뜻하게 흐르는 물줄기들을 느끼며, 나 그리고 새로운 ‘우리’는 어떻게 또 다른 물줄기를 만들어 더욱 큰 흐름으로 키워갈 수 있을지 고민한다. 자기완성의 달성은 동시대 사람들의 행복을 함께 추구할 때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 영혼의 가장 맑은 부분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아름다운 밤하늘의 별빛과 같은 속성이라면 함께해낼 수 있지 않을까.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 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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