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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봄부터 재작년 겨울까지, 나는 대학(원)에 있었다. 연구실과 강의실에서 청춘의 날을 거의 보냈다. 그러는 동안 나를 대학의 구성원으로 굳게 믿었다. 논문을 쓰는 일도 강단에 서는 일도 즐거웠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나는 여기에서 무엇인가, 노동자이자 사회인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하고 물었던 어느 날, 나는 답을 하지 못하고 연구실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강의실에서 나의 호칭은 ‘교수님’이나 ‘선생님’이었다. 건강보험도 보장되지 않는, 재직증명서 발급이 되지 않아 제대로 대출심사를 받을 수도 없는 나를 학생들은 그렇게 불렀다. 아이가 태어나고서는 건강보험을 보장받기 위해 패스트푸드점에서 새벽부터 물류하차 일을 했다. 오후 수업에 들어가면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래도 학생들에게 나는 교수님이었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글을 쓰고는 연구실을 정리했다. 대학에서 보낸 청춘의 시간을 ‘유령의 시간’으로 규정하면서, 대학에서 나왔다. 어느 동료 연구자는 “하라는 연구는 안 하고 왜 그런 글을 썼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마음으로만 “우리 삶이 오히려 연구 대상인데 뭘 연구한다고 연구실에 있기도, 강의실에서 학생들 앞에 서기도, 저는 민망하네요” 하고 답했다.

얼마 후, 나는 대리운전을 시작했다. 우선은 생계를 위해서였다. 글을 쓰는 것만으로는 아이의 기저귀와 분유를 살 수 없었다. 하지만 왜 굳이 대리운전이었느냐고 하면 ‘대리’라는 단어가 갑자기 나의 지난 시간을 규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제대로 된 노동자로, 주체로서 존재하지 못했다. 내가 아닌 어느 괴물의 욕망을 ‘대리’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대리운전, 내가 주체가 될 수 없음을 선언한 그 노골적인 대리노동을 통해 새롭게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작년 5월31일 밤 11시에, 첫 콜을 받았다. 손님은 1.5㎞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고 나는 출발지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그런데 3분 만에 그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나에게 두 마디를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아저씨, 왜 아직도 안 와요?” 하는 것이었다. ‘아저씨’라는 호칭은 아직 대학에 한 발 걸치고 있는 나의 몸을 거리로 패대기쳤다. 교수님, 선생님, 아니면 이름이 유일한 호칭이었던 한 인간은 초면의 누군가에게 아저씨가 되었다. 호칭을 결정할 권리가 이미 그에게 귀속된 것을 온몸으로 실감하며, 나는 신호를 무시하고 뛰었다.

손님의 차에 도착해서도 나는 여전히 ‘아저씨’였다. 모든 관계는 호칭에서부터 그 범위가 상상되고 확장 또는 축소된다. 아줌마, 아저씨, 아가씨. 그러한 호칭에는 한 대상의 자존감을 갉아먹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교수님이라는 호칭이 대학에 있는 동안 나를 은밀하게 주체로서 고양시켜 왔음을 알았다. 그것이 허상임을 알면서도 그 순간만큼은 환각에 빠진다. 반복되다 보면 위화감이나 그 어떤 서글픔도 점차 옅어진다.

호칭은 한 인간의 주체성을 대리하는 수단이 된다. 자신을 그 공간의 주체라고 믿게 만드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여러 구조적 문제들을 덮어 버린다. 나 역시 내가 속한 공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나는 그 구성원이라는 환상에 한동안 빠져 있었다. 근사한 호칭들은 그렇게 한 개인을 쉽게도 잡아먹곤 한다.

권력의 위계를 구분하기 위해 스스로를 호칭하는 일도 흔하다. “오빠가 생각하기에는” “형은 말이야” 하고 굳이 ‘나’를 은폐한다. 군복무 중에는 “연대장은 너희에게 아주 실망했다”거나 “소대장은” “포반장은” 하는 자기 호칭의 서사를 참 많이도 들었다. 그러다 보면 조직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기 쉽다. 개인은 사라지고 호칭으로서 상상된 대리인간이 남는다.

타인의 운전석에서 내리면서, 나는 얼마나 너의 이름을 불러 왔는가를 떠올린다. 호칭 너머의 한 개인을, 인간을 상상하기로 한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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