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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직함에 대하여

opinionX 2017. 1. 12. 11:20

“여기에 제가 있다고 합니다.” 페이스북 친구가 ‘새해부터 오피니언면이 새로워집니다’라는 제목의 경향신문 알림글을 타임라인에 링크하며 남긴 말이다. ‘오호! 나도 여기 2017년부터 고정 기고하기로 했는데, 이분도!’라고 생각하며 해당 링크를 클릭했다. 그러나 그곳에 내 사진은 없었다.

‘뭐지? 분명 오피니언팀으로부터 2017년 고정필자임을 암시하는 e메일이 왔었는데, 마감일에 대한 알림도 받았는데 왜 나는 없지? 사진으로 10장씩 5열, 미적으로 깔끔한 직사각형을 만들고 싶어서 신규 필진 중 50명을 부득이 선별해야만 했을까? 소개된 인물들은 교수, 평론가, 변호사 등 뭔가 전문가답고 지식인 같은 직함을 가진 분이거나 이름을 들으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직관적으로 알 만한 단체의 소속으로 보이던데 나는 잉여라고 무시했나?’ 이에 대해 문의를 했다면 이런저런 추측을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혼자 찌질대며 추측과 고민을 거듭했다. 그래도 덕분에 자아에 대한 탐구와 사회·문화에 대한 고찰까지 할 수 있었다.

그동안 매체에 글을 쓰거나 인터뷰이가 될 때, 나는 주로 ‘월간잉여’ 편집장으로 소개되곤 했다. 거기에는 어떤 기대가 존재한다고 느꼈다. ‘잉여’가 범람하는 시대, 실업자와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는 사람들 또한 넘쳐나는 사회, 지금 이곳에서 분투하고 있는 청년들을 ‘대표’해서 사회문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존재일 것이라는 기대. 조금 부담스럽고 갑갑했다. ‘월간잉여’는 스스로 잉여라고 느끼는 모든 연령대의 글을 담는 것을 지향했으나 대다수가 청년의 글이었고, 나부터가 청년이므로 잡지의 월별 주제는 청년 당사자의 관심사가 반영된 것이었을 테다. 그러나 잡지에 담긴 글 전반을 읽고 청년 문제나 잉여 문화의 경향성을 느끼는 것과 한 개인의 사례를 청년이나 여성 같은 명사로 일반화한 뒤 집단 전체를 안다고 확신하는 것은 다르다. 눈앞에 놓인 사람의 구체적인 말은 귀담아듣지 않고, 대표자(라고 믿고 싶은 귄위자)를 통해 얻은 ‘지식’만을 고수하는 태도는 불통을 초래한다.

매체의 이름이 나라는 개인을 대표하는 유일한 언어가 되는 것에도 경계심을 가진다. 어떤 틀에 갇히는 느낌이다. 게다가 작년부터 ‘월간잉여’를 휴간 중이다. 복간이 언제일지 장담도 못하겠다. 다른 활동들에 더욱 흥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정치의 중요성을 실감한 뒤로는 스스로의 필요를 말로 요구하는 경험을 제공하고 싶어 보드게임 ‘수저게임’을 만들었다. 자기 경험 바깥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의 계기를 제공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껴 단편영화를 찍었다. 그러나 ‘보드게임 디자이너’나 ‘영화감독’이라는 직함을 쓰기는 적절치 않다고 느낀다. 전문성이나 권위를 획득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해서다. 그래서 ‘아마추어 창작자’나 ‘비인증 예술인’과 같은 언어를 고민하고 있다.

나는 또한 ‘헬조선’이 좀 더 살 만한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프로불편러’이기도 하다. 성차별주의자들의 언행에 막막하고 속 터질 때가 많은 여성이며, 위로가 되는 관계를 맺으며 보람과 즐거움으로 일상을 채우고픈 시민이다. 그러므로 어떤 수식어도 단 한번에 내 존재를 일축하고 온전히 규정지을 수는 없다고 본다. 결국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텐데, 글의 맥락에 따라 그때그때 어울리는 수식어로 바꿀 수는 없을까? 이런저런 고민 끝에 담당자와 통화를 하게 됐다.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고정필진으로는 처음이지만 앞서 간헐적으로 기고를 한 적이 있어서 신년 ‘사고’를 통한 소개 대상에서는 빠졌다고 했다. 역시 직접 대화하는 게 빠르다. 불통을 기반에 둔 추측은 오해의 근원이다!

그래도 이번 ‘삽질’을 통해 가다듬은 관점은 여전하다. 일간지에서 실직자, 백수, ‘프로불편러’ 등 권위나 전문성을 담지 않은 수식어로 스스로를 설명하는 사람들의 글을 더 자주 보고 싶다는 것. 스스로 ‘보통’ 내지 ‘주류’의 범주에 속한다고 믿는 독자가, 자신이 타자로 규정한 이들 역시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라 느끼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공동체라는 감각의 외연이 확장되길 바란다. 나 역시 거기에 일조하고 싶다.

최서윤 아마추어 창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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