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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갓 뽑은 따끈한 에티오피아산 커피는 나를 잠에서 서서히 깨운다. 그러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는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이내 식는다. 사람은 늙기 마련이고 영원할 것 같은 저 하늘의 별들도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장렬히 빛을 내뿜으며 사라질 것이다.


우주 안에 괴물 중 괴물이 하나 있다. ‘시간’이다. 이 괴물을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시간은 날아간 화살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쏜살처럼 다가오는 미래를 추호도 모르면서 무방비상태로 매 순간 진입한다. 나에게 남겨진 것, 아니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것은 ‘과거’라는 기억뿐이다.

이 ‘과거’라는 기억은 20년 전이나 20분 전이나 현재의 시점에서 ‘순간’이란 점이 경이롭다. 워싱턴 어빙의 소설 <립 반 윙클>에서 주인공 립 반 윙클은 아내의 잔소리가 싫어 ‘울프’라는 개와 뉴욕 근처에 있는 카트스킬산 속으로 어슬렁거리며 들어갔다. 그때는 영국 왕 조지3세가 미국을 다스리던 시절이다. 그는 산속에서 밀주를 마시며 나무 막대기를 세워놓고 ‘론 볼즈’(볼링)를 치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잠이 들고 만다. 한참 잔 후, 어느 날 아침 햇살에 잠을 깨고 보니, 울프는 없어지고 들고 왔던 장총이 녹슬고 자신의 턱에는 턱수염이 텁수룩하게 자라 있었다. 마을로 내려와 평소에 가던 여관에 가니 못 보던 국기와 사진이 걸려 있었다. 미국 성조기와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다. 그가 잠깐 자는 동안 조지 워싱턴이 혁명을 일으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그는 이제 미국 시민이 되었다. 그는 한순간에 20년을 자버렸다. 20년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분명한 것은 20년이 금방 지나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씨줄과 공간이라는 날줄이 만나는 지점에서 존재한다. 순간이란 봄의 약동으로 싹이 트고 꽃망울을 터뜨리는 그 찰나(刹那)다. 봄이 약동하면 잎과 꽃망울은 모든 찰나에 과격하면서도 거칠게 변화한다. 이 찰나의 순간에 식물은 자신의 색깔과 자기 몸의 구조를 다채롭게 변화시킨다. 만일 성능이 강력한 현미경으로 나무의 속살을 들여다본다면, 그 안 섬유질이 매 순간 변화하고 팽창하고 줄어드는 것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_경향DB

그리고 만물은 자신의 운명에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모두 시들어버린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찰나에 그 현상과 본질이 변한다. 이 인식의 순간을 영어로 ‘moment’라 한다. 이 단어도 정지가 아니라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라틴어 ‘momentum’은 ‘움직임/ 움직이는 힘/ 변화’ 혹은 ‘순간’이라는 의미다. 움직임을 구성하는 한 동작 한 동작이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한순간에 저만치 가버린다.

‘눈 깜짝할 사이’는 시간적인 경험이며 눈을 뜨고 감는 그 사이에 본다는 행위를 통해 그 순간에 사물을 인식한다.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그런 순간을 또 다른 눈인 카메라 렌즈로 포착한다. 그는 눈과 렌즈와 마음이 하나가 되는 신비한 합일의 점에서 자신도 모르게 셔터를 누른다. 그는 이 순간을 ‘결정적 순간’이라 부른다. 그는 이 작지만 혁명적인 카메라를 통해 흘러가는 시간과 공간에 개입해 파괴하고 정지시켜, 일상을 거룩한 정지, 영원으로 만든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흘러가는 양적인 시간을 그리스어로 ‘크로노스(chronos)’라고 부르고, 신이 개입하는 결정적이며 질적인 시간,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지만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시간, 영원한 시간을 그리스어로 ‘카이로스(kairos)’라고 부른다. 그는 오랜 기간 수련을 거쳐 셔터를 누를 ‘카이로스’를 직관으로 감지한다. 그러나 그 순간에 다가설 때마다, 자신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사진은 직관, 몰입, 평온, 그리고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저서 <국가>에서 교육의 본질을 설명한다. 그는 하찮은 순간이 영원한 순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동굴의 비유’에서 극적으로 보여준다. 입구가 빛으로 열려져 있는 동굴 안 깊은 곳에 어려서부터 다리와 목이 고정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뒤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꼭두각시를 들고 그림자를 동굴 벽에 비추었다. 족쇄에 묶여 한 곳만 일생 보아왔던 이들은 인위적인 물건들의 그림자를 실재하는 물건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다 한 사람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이 그림자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야겠다고 결정한다. 그는 자신이 매달려온 안전장치인 족쇄를 부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순간에’ 일어나자신이 일생 동안 보았던 동굴 벽에서 눈을 뗀다. 그는 시선을 빛이 있는 쪽으로 돌려 걸어가 빛을 보기 위해 눈을 높이 든다. 이 모든 행동은 낯설고 어렵고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처음 보는 태양빛은 너무 눈부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플라톤은 자신의 과거로부터 단절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동력을 부사(副詞)로 표현했다. 고대 그리스어로 ‘엑사이프네스(exaiphnes)’는 흔히 ‘갑자기, 한순간에’라고 번역된다. 이 순간은 카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인 순간’처럼 타성과 게으름을 일깨워, 고정되어 있는 나의 시선을 돌려 빛을 향해 걸어 나가게 만든다. 자기 변화의 기초는 바로 이 모멘텀, 지금 이 순간을 포착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으로 걸어가는 수련이다. 당신은 이 순간을 흘려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어렵지만 이 순간에 집중해 자신만의 빛을 찾기 시작하면 어떨까요?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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