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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분야에서 존경받는 일인자가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일가를 이루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행복한 임무를 발견하고 정진할 때, 우리를 좌절시키고 포기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 임계점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다. 재능이면서, 결심이자 단호한 의지다.

이것은 소위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의 구분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즐기는 사람만이 건너갈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은 바로 인내(忍耐)다.

거의 30년 전 나는 한 언어에 매료되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구약성서>를 기록한 고전 히브리어다. 나는 그 당시 어두운 숲속을 헤매며 한 줄기 빛을 찾고 있었다.

내 몸과 정신, 그리고 영혼까지 송두리째 앗아갈 정도로 매력적인 그 무엇. 그것이 바로 고전 히브리어였다. 이 언어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수업 첫 시간은 좌절 그 자체였다. 글자 모양, 소리, 단어와 문장, 발음. 이 모든 것이 너무 생소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이 언어가 내 일생의 동반자가 될 것이라고는 추호도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이 언어를 사랑할 수 있는가? 내 전략은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 우선 내 일과는 이 언어 공부가 전부였다. 이 언어의 신비한 매력에 빠져 점점 시간을 늘리고 있었다.

3년 정도 공부하니, 이제 고전 히브리어가 내게 말을 걸어왔고, 문장의 단어와 단어 사이에 공간의 의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남들이 들어가 볼 수 없는 경지에 들어가 견딜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랑이 가져다주는 선물이 바로 인내다. 아마도 사랑과 인내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구분할 수 없는 신비한 합일(合一)이다.

인내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 짓는 최고의 덕목이다. 인간에겐 특별한 취미가 있는데, 자신의 신체를 극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스포츠다. 그런 경기들 중 단연 돋보이는 극한 스포츠가 ‘마라톤’이다. 4년마다 열리는 국제 스포츠 경기인 올림픽의 꽃은 맨 마지막에 거행되는 ‘마라톤 경기’다.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가 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서 1위로 결승 테이프를 끊고 있다_연합뉴스

마라톤 경기는 모호한 매력이 있다. 뛰는 사람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환희와 재미를 선사한다. 42.195㎞를 일정한 속도로 뛰어가는 한 사람의 영웅적인 모습. 그의 모습에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자기 자신을 극복하려는 인내를 찬양한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과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땀은 인내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이라고 묵묵히 그리고 감동적으로 외친다.

인간은 왜 이렇게 자학하는가? 인내가 인간 승리의 표상인가? 달리기 선수들은 특별한 엑스터시 경험을 말한다. 대부분 이 경험을 신뢰하고 자신들이 직접 경험했다고 말한다.

이들은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 도달하면, 고통을 거의 느끼지 않고 쉽게 즐기며 달릴 수 있는 단계에 진입한다.

이 기분이 진짜일까? 진짜라면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장거리 전문 선수들 중 일부는 자신이 기절할 정도로 달려 완주한 후, 평온함을 느꼈으며 심지어는 행복감에 젖었다고 말한다.

이것을 영어로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고 한다. 최근 과학자들은 극도의 인내를 요구하는 장거리 달리기를 할 때 선수의 뇌에서 기분을 전환시키는 화학성분이 분비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화학성분을 엔도르핀이라고 부른다. 장거리 달리기와 유사한 격렬한 운동을 하는 선수들의 뇌, 특히 변연계와 전두엽 부분에서 엔도르핀이 감지되었다. 이 부분들은 사랑에 빠지거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콘체르토 3번과 같은 감동적인 음악을 들었을 때도 활성화된다. ‘러너스 하이’는 인내에 따른 혜택이다.

세상의 모든 꽃들이 저마다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 이유는, 자신에게 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몰입되어 자연의 흐름에 따라, 천재지변이 있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순간에 눈부시게 자기에게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 꽃들이 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금기와 같은 두 가지다. 다른 꽃들을 부러워하거나 자신을 그것들과 비교하는 일이다. 아니, 태생적으로 부러움과 비교는 그들의 삶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행복한 천재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깊이 사랑하지 않고, 자신이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일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성찰을 통해 찾았다면, 그 일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전념하면 되지 않을까? 우리 교육은 언제부터인가 부러움과 비교에서 시작하지 않았는가? 당신은 ‘러너스 하이’를 통한 자신만의 사명을 알고 있는가?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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