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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다낭을 거쳐 후에에 도착했을 때, 비가 몹시 내렸다. 베트남 어느 도시나 그렇듯 오토바이는 개미떼처럼 도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도로 정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걷기 힘든 곳 투성이였다. 날씨까지 안 좋았으니 첫인상이 좋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여행을 다닐 때, 지역의 명승지는 가지 않는 편이다. 런던에 갔을 때 비교적 오랜 시간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빅벤이나 버킹엄 궁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도쿄, 오사카, 방콕, 뉴욕 등등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유산은 사진으로만 봐도 충분하다는 게 지론이기 때문이다. 대신 동시대의 문화를 느끼러 가곤 한다. 클럽을 다니고 레코드 스토어를 들른다. 그런데 후에라니? 여행, 하면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는 지인이 후에가 미식의 도시라는 한마디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도착하자마자 미친 듯이 먹어댔다.
이태원을 연상케 하는 여행자 거리의,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화려한 곳을 쏘다니며 배를 불렸다. 마지막으로 딱 한 잔만 더 할 요량이었다. 어느 도시에나 음악 술집은 있기 마련. 앱을 켜서 찾아보니 음악을 주요 해시태그로 내세운 바가 있었다. 여행자 거리 외각의 어두운 골목 한쪽, 라이브 음악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들어갔다. 10여석이 채 안되는 작은 바였다. 그 바의 한구석에서 무대조차 없이 현지의 젊은이들이 노래하고 연주하고 있었다. 바에 앉아 맥주를 시켰다. 어디서 왔냐는 직원의 말에 한국이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노래하던 20대 초반 여성이 또렷한 한국어로 “한국에서 오셨어요?”라고 하는 거 아닌가. 그러더니 “한국 노래 하나 불러드릴까요?”라며 “잘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밴드 뷰렛이라고…” 하면서 뷰렛의 ‘거짓말’을 불렀다. 연주력, 사운드 같은 걸 따질 계제는 아니었지만 보컬의 한국어 노래 실력이 정말 뛰어났다. 단순히 가사를 외워서 부르는 걸 넘어서 어미 처리라든가, 감정 표현이라든가 하는 게 완전히 한국인 수준이었던 것이다. 노래가 끝나고 물어보니 현지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는 학생이란다. 동남아 여행을 가면 어디서나 한국 아이돌의 음악을 들을 수 있지만 밴드 음악은, 그것도 라이브로는 처음이었다. 예전 미국에서 양희은과 송창식을 알고 있는 백인 청년을 만났을 때만큼 신기했다.
이 친구의 순서가 끝난 후에는 그 또래 청년이 나와 다른 연주자들과 함께 색소폰을 연주했다. 자세히 보니 이쪽에 드문드문 손님들이 있는 데 비해 무대(?) 옆쪽으로는 현지 젊은이들이 오손도손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맨손으로 드럼 연습을 하고 누군가는 악보를 보고 있다. 보아하니 이곳은 관광객을 위한 음악 술집이라기보다는 후에 음악 애호가들의 아지트 같은 곳이리라.
내가 가장 좋아하고 관심있는 대중문화의 영역은 청년 하위 문화다. 기성세대의 인정, 주류 유행과는 상관없이 확고한 취향을 가진 소수의 젊은이들이 모여 자신들만의 문화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성장하는 스토리를 좋아한다. 1970년대의 무교동, 80년대의 신촌과 이태원, 그리고 90년대의 홍대 앞 문화가 모두 그런 젊은이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모바일과 SNS가 완전히 자리 잡은 지금, 즉 문화적 경계와 시차가 의미 없어진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어진 풍경일 것이다. ‘작은 세계’에서 문화적 역량이 축적되기도 전에 새로운 것을 좇는 이들은 그 작은 세계를 과잉 소비한다. 순식간에 젠트리피케이션의 파도가 덮친다. 일상화된 구조다.
록과 한국 밴드 음악, 그리고 케니지까지 장르도 스타일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연주하는 후에의 청년들을 위해 작은 액수나마 팁을 자리에 놓고 나왔다. 덥고 조금은 습한 밤거리 속으로 들어가는 나를 배웅해준 건 역시 그들이 연주하고 노래하는 베트남 음악이었다. 홍대 앞에서 버스킹이란 이름의 소음을 유발하는 이들보다는 실력이 좋았고, 실용음악 시스템에서 학점에 길들여진 이들보다는 표현력이 좋았다. 후에의 이름 모를 젊은이들에게서 청년문화의 추억을 떠올렸던 이유일 것이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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