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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근원

산은 생각의 학교다. 네모난 방, 사각의 모니터에서는 만날 수 없는 생각들이 찾아온다. 아침에 해와 동창생처럼 나란히 출발해서 태백산에 오른다. 천제단 앞에서 몰려오는 칼바람에 맞서 오래된 생각에 젖는다.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의 8폭 병풍처럼 첩첩이 도열하는 산들. 왜 산은 멀어질수록 작아지는가. 여러 고비를 넘기고도 아직 신통한 답을 구하지 못한 채 여기까지 왔다. 그건 그냥 그래서 그렇다는 것으로 여기며 그 질문은 다음으로 넘긴다. 이윽고 온종일 헤매다가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와 헤어져 산을 빠져나온다. 하루 만의 졸업생인 양 되돌아서서 공손히 배꼽인사를 한다.

늦은 밤 책 하나를 펼쳤다. <산의 기억-사진가 김근원의 산과 사람들>(열화당 발행). 태초의 모습 그대로의 산과 그 아래 턱 버티고 있는 산사나이들. 사진사가 사진에 나오지 않듯 책의 표지에 저자가 없다. 저자는 타계하고, 사진만 남은 것이다. 이제 그의 아들이 고르고 고른 사진과 아버지에게 들은 기억을 되살려 쓴 글. 흑백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총천연색이라는 걸 새삼 일깨우는 글과 사진들이 참 억수로 좋다. 그중의 한 대목, “지금 생각하면 지리산이 별로 변한 것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운해와 고사목을 소재로 거창한 사진을 찍고 있고, 어떤 사진 콘테스트에서 상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곤 한다. 단지 달라진 것은 초가집과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이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지리산은 내 고향 거창에서도 가깝다. 지상이 개발의 천국이라면 공중은 늘 그대로이다. 천둥과 번개가 활약하고, 비와 구름이 노니는 곳. 사진 속 자갈 옆에 엎어져 노는 아이들 중의 하나는 육십년 전의 나라고 해도 될 만큼 등짝이 닮았구나.

오늘 산에서 건진 생각 하나는, 글은 삶이 흘린 눈물이다, 라는 것이었다. 책에는 아버지가 흘리고 아들이 갈무리한 생각들로 흥건하다. 우리 사는 세상이 특별하지는 않지만 신기로운 건 있다. 천하 만물이 모두 빛의 자식이라는 것도 그 신기한 사실 중의 하나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낱낱이 분해되고야 만다. 그때 빛의 속도로 세상을 떠나 우주로 날아간다면!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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