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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언율시, 오언절구, 사자성어를 생각해 본다. 팽나무 씨앗에 팽나무의 모든 미래가 온축되듯 한자에는 한 글자 너머의 뜻이 깊이 쌓인다. 세 글자의 단어도 있다. 어느 철학책에서 만난 ‘단독자’는 날이 갈수록 새록새록 새겨지는 말이다. 지금 나에게 와닿는 말 하나를 고르라면 단연 ‘광합성’이다. 산에 다니면서 식물에 대한 궁리 끝에 길어 올린 것이다. 이 세상을 먹여 살리는 밑바탕이 바로 저 세 글자에서 비롯되지 않겠는가.

오래 묵혀둔 숙제를 풀려고 한국고전번역원에 왔다. 뒤늦게 고전에 입문하려고 해보지만 굳어진 머리와 고드름처럼 자란 나이가 발목을 잡는다. 맹자의 한 대목에서는 천하에서 공히 존중하는 셋 중의 하나로 나이를 들기도 하지만 이게 결코 자랑은 아니다. 어차피 홀로 걷는 길, 또 한번의 결기가 필요해진 나는 ‘단독자’라는 말을 불러내야 했다. 번역원의 소식지인 ‘고전사계(古典四季)’를 뒤적이다가 새로운 말 하나를 얻어가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동무해준 건 멀리 북한산이었다. 되짚어보니 불광사에서 비봉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지척에 있다. 

고전사계에서 얻은 말은 ‘화신풍(花信風)’이다. 소한부터 곡우까지의 스물네 번 꽃소식을 전하는 바람이라고 한다. 봄이 왔다고 그냥 봄은 아니다. 꽃이 피고, 나무가 옷을 갈아입고, 훈풍이 분다고 도래하는 봄도 아닐 것이다.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훈훈한 눈길이 있어야 비로소 봄은 완성되는 것.  

논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너희들은 어째서 詩를 배우지 않느냐? 시는 감흥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물정을 살필 수 있게 하며, 여러 사람과 어울릴 수 있게 하고, (…) 새, 짐승, 풀,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 아직 눈에 띄는 건 없지만 곧 흙이 피워올리는 한 편의 시처럼 꽃들이 얼굴을 내밀 것이다. 바이러스가 사람들 사이를 벌어지게 할수록 올해는 더욱 기본으로 돌아가 꽃을 많이 보고 시도 많이 읽어야겠다, 자연과의 접촉 면적을 최대한 늘려야겠다고 새삼 결심해 보는 스산한 오후.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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