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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四時)는 명확하고 지금은 틀림없는 겨울이다. 거꾸로 자라는 고드름, 뺨을 에는 찬바람, 구슬피 우는 철새. 몇 가지 익숙한 풍경이 있지만 그래도 흰 눈이 보자기처럼 세상을 덮어야 비로소 겨울이 완성된다. 그리하여 손오공이 근두운을 타고 천하를 주유하듯, 우리도 그 흰 천을 뒤집어쓰고 매서운 세계로 날아가는 것. 퍽 불길하다. 올해처럼 이렇게 낡고 닳은 보자기가 있었던가. 

지난주 철원 고대산으로 갈 때, 혹 눈이 있을까. 은근한 기대가 있었다. 꽃을 찾아 남쪽으로 간 적은 허다했지만 일부러 눈을 찾아 북쪽으로 가기는 처음이었다. 응달의 으슥한 골짜기를 지나 능선에 도착하니 눈기운이 완연해졌다. 이윽고 문바위를 지나면서부터 발밑에 시장이라도 선 듯 시끌벅적해졌다. 눈 밟는 소리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참 다정한 소리. 뽀드득뽀드득뽀드득.

모처럼 접촉하는 눈과의 경계에서 특히 생각해 보는 것이 있었다. 오늘 따라 눈소리가 조금 다르게 들리는 게 아닌가. 삐거덕삐거덕삐거덕. 그것은 가슴 한쪽을 좀 불편하게 긁는 듯 조금 헐거워진 갈비뼈가 내는 소리를 닮았다. 어쩌면 그것은 장도리로 송판에서 굵은 대못을 빼는 소리로 연결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을 뜬다. 어디로 떠날지도 잘 안다. 모두들 지금 밟고 있는 이 땅 아래로 잠겨 들어가야 한다. 존재하는 이들이 돌아다니는 것, 나무가 잎사귀를 살랑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 이는 돌아갈 곳의 근황을 미리 한번 살펴보는 동작들이 아닐까.

지금 나무는 헐벗었고 아직 꽃은 이르다. 어디에서 복수초가 피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러기에는 이곳은 너무 북쪽이다. 오늘은 꽃 대신 돌이다. 돌은 내 무거운 무게를 잠시 맡기려면 궁합을 잘 맞추는 누군가의 은근한 엉덩이에 불과하겠지만 이 세상의 배후를 궁금히 여기고 궁리하면서 바라보면 지하에서 올라온 참신한 얼굴이 된다. 일찍 넘어가는 산중의 해를 가늠하면서 홀로 뒤에 처진 채 누구를 퍽 닮은 돌들과 내가 내는 소리를 실컷 보고 들었다.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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