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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의 친구 푸지씨네 이발소로 어느 날 싸늘한 한기를 몰고 회색신사가 찾아온다. 그는 시간저축 은행에서 왔다고 자신을 근사하게 소개하며, 여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는 인생을 꿈꾼다면 바로 그 시간을 아껴야 하고 ‘시간은 돈’이라며 푸지씨를 다그친다. 사실 그동안 푸지씨는 귀가 어두운 어머니 곁에서 매일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일이 끝나면 지역 합창단에 나가 노래도 부르고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였다. 또 매일 30분씩은 사랑하는 다리아양에게 꽃을 들고 찾아가 그녀를 기쁘게 해주는 삶을 살아왔다. 그가 얼마나 시간을 아끼지 않으며 살았는지 깨닫게 해준 시간도둑 회색신사가 잿빛차를 타고 부웅 떠나자 푸지씨는 이제부터 빈틈없이 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시간을 알뜰하게 쪼개 일할수록 모두 도둑당해 손톱만큼의 시간도 남지 않는다. 미하엘 엔데의 동화책 <모모> 속 마을 사람들은 곧 모두가 쉴 틈 없이 열심히 일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진다.

우리 사회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 노동시장에서 일을 하며 삶을 영위하는 모습은 우리가 언젠가 그려본 그 삶을 얼마나 닮아있을까.

한국의 복지지출 수준은 선진국의 평균치보다 한참 낮다. 어느 정도의 괜찮은 삶을 위해 필요한 대부분의 것에는 가격이 매겨져 있다. 주거, 교육, 돌봄, 문화생활, 나와 가족의 건강뿐만 아니라 나의 미래를 위한 보험까지 계속해서 구매해야 한다. 시장에서의 현금교환을 통해서만 괜찮은 삶을 영위할 수 있으니 시장구매력이 곧 삶의 질을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이 시장구매력이 노동을 교환한 대가로 얻는 임금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임금노동을 하고 시장소득을 확보해야 한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도 모든 것을 구매해야 어느 정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으니 한 단위의 시장소득을 더 늘리기 위해 더 많이 일할 수밖에 없다. 일하는 시간이 정말 돈이고, 그 돈이 곧 삶의 질을 결정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고용관계가 불안정하거나 임금수준이 낮은 사람들의 삶은 고달프고 비참하다. 고용계약이 불안하여 언제 소득이 끊길지 모를수록 고용주가 원하는 만큼, 또 시간당 임금수준이 낮을수록 오랜 시간을 일해야만 어느 정도의 소득을 벌고 살 수 있다. 현재 임금근로자 세 명 중에 적어도 한 명은 고용관계가 불안정하고, 다섯 명 중 한 명은 국제노동기구 기준으로 저임금 근로자이다. 여기에 영세자영업, 특수고용 등 한국 노동시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살펴보면 불안정한 노동자의 수는 증가한다. 이러한 불안정 노동자가 어느 정도 살아가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선택은 장시간 노동이다. 고용관계가 불안한 사람일수록 더 쉼 없이 일하고, 저임금노동자일수록 초장시간을 일하고 있다.

작년에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가 구의역에서 숨진 청년의 가방 속에 있던 컵라면은 그가 쉴 틈 없이 위험한 일을 얼마나 바쁘게 해내고 있었는지 가늠하게 해준다. 외주화가 일반화되고 있는 게임 업계는 하루 노동시간이 13시간에 달하는 과도한 근로시간이 있는데 작년에 청년이 넷이나 사망했다. 올해 사망한 집배원의 수는 벌써 12명이다. 

대전지방고용노동청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집배원의 연평균 업무 시간은 약 2800시간으로 이미 너무나도 긴 한국의 연평균 근로시간(2285시간)보다도 500시간 이상을 더 근무한다.

최근 2018년도 최저임금이 7530원으로 결정되었다. 그나마 반가운 결과이다. 최저임금이 인상되어 청년들이 열심히 일할 생각을 않고 쉬운 알바만 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는데 한심한 우려다. 또 최저임금 인상으로 실업률이 증가하는 것을 걱정하기 전에 주 40시간 근로기준 준수, 주 52시간 근로시간 상한제의 법 개정으로 근로시간을 줄이는 것이 실업률 감소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부터 분석해야 한다.

회색신사들은 장시간 노동은 마치 자발적인 것처럼 속이지만 좋은 복지서비스가 무상으로 제공되고 노동의 대가도 충분히 인정되어 장시간 일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면 일의 의미도, 그리고 불안정 노동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삶의 모습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시간이 곧 삶 자체인데 시간을 훔치는 것은 삶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 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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