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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시간여행 이야기, 즉 타임슬립(time slip)물이 유행이다. 2012년 드라마 <인현왕후의 남자>와 <옥탑방 왕세자> 등이 화제를 모으고 2013년 <나인>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시간여행자들의 사랑은 팔리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타임슬립의 매혹은 2014년 4월16일을 기점으로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바로잡고자 하는 대중적 욕망과 만났다.

전 국민이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한 채 생방송으로 304명의 생명이 사그라져 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던 그날 이후, 대중문화는 이 집단적 트라우마에 말을 걸고 문화적으로라도 위로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그렇게 드라마 <시그널>(2016)을 비롯해서 영화 <시간이탈자>(2015),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2016)에 이어 <하루>(2017)까지, 시간을 거슬러 살면서 재난이나 사고, 소중한 이의 죽음을 막으려는 이야기들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그런데 ‘포스트 416’ 타임슬립물에는 두드러지는 특징이 하나 있다. 시간을 거스르는 것은 언제나 남자고, 과거에 박제되어 반복적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언제나 여자라는 것이다. 도대체 왜일까?

시간(time)으로부터 미끄러질(slip)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은 시간을 살아갈 수 있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시간을 산다는 것은 자신만의 모험을 할 수 있다는 뜻이며, 그렇게 성장하고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남성중심적인 서사 관습 안에서 시간은 언제나 남자들의 것이었고, 그렇게 남자들만이 시간 속에서 쌓여온 이야기, 즉 역사의 주체가 되어왔다. 그러므로 역사가 남겨준 지혜와 지식 역시 남자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여자는 시간이 아닌 공간에 박제되어 그 자리에 머물면서, 남자들이 벗어나야 하는 과거(트라우마)로 존재하거나 성취해야 하는 미래(트로피)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야기가 아닌 현실에서 과거에 고착되어 성장 없이 떠돌고 있는 것은 오히려 가부장제의 상상력과 그에 기생하여 연명하고 있는 어떤 남자들인 것 같다.

얼마 전 개봉했던 <하루>는 이런 퇴행적인 성격을 잘 보여준다. 영화는 딸의 죽음을 목격하는 준영과 아내의 죽음을 목격하는 민철의 기구한 운명을 그린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가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하루는 끝도 없이 반복된다. 그야말로 무간지옥이다.

점차 이 타임슬립에 숨겨져 있던 비밀이 밝혀진다. 3년 전 준영과 민철의 잘못된 판단으로 아들을 잃은 강식이 복수극을 펼치면서 세 사람은 시간의 굴레 속에 갇혀 버린 것이다. 강식은 복수를 위해 남자들 본인이 아닌 그들의 딸과 아내를 해친다.

영화 내적으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의 원칙이 적용되었을 터지만, 영화 외적으로는 시간과 여성의 관계를 상상하는 것에 무능한 한국 대중문화의 현실을 보여준다. 하루라는 시간이 반복될 동안 여자들은 아무런 지식도, 깨달음도 얻지 못한다.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셀 수 없이 목이 졸리고 차에 치인다.

남성이라는 이유로 진실을 아는 자의 자리에 오르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의 소유물이 되어 그들 간에 펼쳐지는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 ‘요리’되는 것. 그렇게 남성이 지켜주지 않으면 반복적으로 폭력에 희생될 수밖에 없는 것. 이런 상상력이야말로 여성혐오 문화의 원인이자 결과다. 그리고 그런 문화가 여성을 살해한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들은 달라지고 있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평등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이 운동에 동의하지 않는 남성들과 한국 사회 전반은 어떤가? 변화를 갈망하면서 싸움을 시작한 여성들 앞에서 시간은 누구와 함께 흐를 것인가? 남자만이 시간을 여행하는 타임슬립물의 유행은 역사의 주체로서 남성이 아닌, 역사를 만들어가지 못하는 남성의 퇴행을 보여주는 징후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성장하지 않으면서 군림하려는 자들의 서사는 끝날 때가 되었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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