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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 심리전단에 대선개입을 지시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국정원법 위반 혐의는 유죄로 인정됐으나 집행유예형을 받아 재수감을 면했다. ‘대선 기간 중 정치에는 관여했지만 선거에는 개입하지 않았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술 마시고 핸들을 잡기는 했으나 음주운전은 안 했다는 논리인가. 상식적으로나 법리적으로나 납득이 가지 않는 판결이다. 원 전 원장은 처벌하되 박근혜 정권의 정통성 논란은 막으려다 나온 ‘정치적 판결’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는 국정원의 댓글·트위터 활동이 “정치인으로서의 대통령 및 여당을 지지하고, 야당 및 정치인들을 반대·비판했다”며 국정원법이 금지한 정치관여 행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법원은 그러나 이 같은 행위에 목적성·능동성·계획성이 부족한 만큼, 선거법에서 규정한 선거운동으로는 볼 수 없다고 했다. 정치관여를 넘어 선거개입이 되려면 보다 치밀한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취지다.

국정원 대선개입 무죄판결을 규탄하기 위해 청계천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 (출처 : 경향DB)


문제는 법원이 든 근거다. 재판부는 “선거운동은 특정 후보의 당선이나 낙선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검사가 선거운동의 시작점으로 기소한 2012년 1월은 18대 대선후보의 윤곽조차 불명확한 상황이었다”고 지적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로 확정되지 않았을 뿐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당의 혁신작업을 주도하고 있었다. 새누리당 후보가 누가 될지 온 국민이 다 알고 있었는데, 재판부만 윤곽조차 몰랐단 말인가. 이러니 ‘짜맞추기’ 판결이란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국기문란 행위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그런데 이러한 중범죄를 총지휘한 사령탑이 집행유예를 받고 유유히 귀가했다. 이 장면은 선거에 개입할 수 있는 국가기관과 공직자들에게 좋지 않은 신호를 줄 것이다.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에서 여론조작에 나선다 해도 선거법 따위는 ‘무사통과’할 수 있다는 신호 말이다. 선거의 공정성을 훼손하는 행위를 엄벌해야 할 사법부가 외려 이를 감싸고 관권선거를 사실상 합리화하는 결론을 내린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상급심에서는 보다 엄정한 심리를 통해 상식과 정의에 부합하는 판결이 내려지기 바란다.

청와대와 새누리당도 기뻐할 때는 아니다. 원 전 원장이 선거법 위반 혐의에 무죄를 받았다고 하나, 국정원이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 및 여당을 지지”하는 행위를 한 것은 사실로 드러나지 않았는가. 깊이 반성하고 자중함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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