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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부장판사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에 대한 법원 판결을 비판하고 나섰다. 김동진 수원지법 성남지원 부장판사는 법원 내부게시판에 올린 ‘법치주의는 죽었다’는 글에서 원 전 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무죄 선고를 신랄하게 꼬집었다. 김 부장판사는 “국정원이 2012년 대선에 불법 개입한 점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서울중앙지법 재판부만 선거개입이 아니라고 한다”며 이번 판결을 ‘궤변’으로 규정했다. ‘정치관여는 했지만 선거개입은 안 했다’는 모순적 판결이 법원 내부에서조차 비판받기에 이른 것이다. 한국 사법의 슬픈 현주소다.

우리는 원 전 원장에 대한 판결을 두고,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라 밝힌 바 있다. 김 부장판사의 비판 역시 일반인과 동떨어진 어려운 법이론이 아니라 평범한 상식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2012년은 대선이 있었던 만큼 선거개입과 무관한 정치개입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고는 재판장에게 물었다. “원 전 원장에게 선거개입 목적이 없었다니….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 따라 독백할 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까?” 담당 재판부는 대법원 판례를 인용해가며 ‘선거법 무죄’를 설파했으나 동료 부장판사조차 설복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대선 개입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11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징역 2년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뒤 법정을 나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대법원은 전산망 운영지침과 법관윤리강령 등에 따라 김 부장판사의 글을 직권삭제했다고 한다.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침해하고, 다른 법관의 사건을 공개적으로 논평하지 못하도록 한 규정을 어겼다는 것이다. 징계위원회 회부설까지 나오는 걸 보면 내부의 비판론 확산을 조기에 차단하려는 조치로 짐작된다. 그러나 대법원이 할 일은 따로 있다. 김 부장판사가 밝혔듯이 “국민의 상식과 순리에 어긋나는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함)의 판결”이란 비판이 왜 끊이지 않는지 성찰하는 게 먼저다. 대중에게 낯선 법리와 판례를 교묘한 언설로 짜맞춰오지는 않았는지 겸허하게 돌아봐야 한다. 사법시스템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야 한다.

선거는 대의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핵심적 장치다. 선거의 공정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힘있는 국가기관이 선거의 공정성을 훼손하는 것은 특히 심각한 문제다. 선거제도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키우기 때문이다. ‘원세훈 대선개입 무죄’ 판결의 의미는 단순히 원 전 원장이나 국정원에 면죄부를 준 데 그치지 않는다. 선거의 공정성이란 가치를 폄하함으로써 대의민주주의의 기반을 흔드는 사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사법부의 맹성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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