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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경찰서장이 한국전력의 경북 청도 송전탑 건설공사를 반대해온 주민들에게 돈봉투를 뿌린 사실이 드러났다고 한다. 분쟁이 일고 있는 지역이라면 당연히 엄정중립의 자세로 주민과 기업 양측의 위법 여부를 판단·감시해야 할 경찰 책임자가 주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기업의 ‘돈 심부름꾼’을 자처했다고 하니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경찰의 직무 범위는 범죄의 예방·진압과 수사, 경비 및 대간첩작전, 치안정보의 수집·작성 및 배포, 기타 공공의 안녕과 질서유지 등이라고 경찰관직무집행법은 규정하고 있다. ‘분쟁지역 주민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기업이 내놓은 돈을 주민들에게 대신 살포하는’ 행위는 법에 규정된 경찰의 직무 범위를 아무리 확대해도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 것이다.

경북 청도 송전탑 건설에 반대해 온 청도 주민들이 12일 경북지방경찰청 민원실에서 경찰이 건넨 돈봉투에서 돈을 꺼내 공개하고 있다. _ 연합뉴스


‘청도 345㎸ 송전탑 반대 공동대책위원회’와 경찰에 따르면 추석 이튿날인 9일 청도경찰서 직원이 ‘청도경찰서장 이현희’라고 적힌 돈봉투를 청도군 각북면 삼평1리에 사는 송전탑 반대 할머니들에게 돌렸다고 한다. 돈봉투 8개에는 100만~500만원씩 모두 1600만원이 들어 있었는데 주민 대부분은 봉투를 받지 않거나 돌려줬고, 일부 주민의 경우 자녀가 받거나 경찰관이 집에 두고 갔다는 것이다. 이현희 서장은 “관할서장으로서 송전탑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고 싶었고, 고생하는 주민들의 약값으로 보태자는 뜻을 한전 측에 전달해서 봉투를 만들었다”면서 선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위와 목적이 무엇이든 현직 경찰 간부가 기업에서 돈을 받았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파문이 일자 경찰은 이 서장을 직위해제하는 등 발빠른 조처를 취했다지만 이 정도로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니다. 이 서장을 비롯한 청도경찰서 관계자와 한전 측을 대상으로 철저한 진상조사를 실시한 뒤 불법행위가 드러나면 엄정하게 처벌해야 한다. 또한 주민들 약값 명목으로 수천만원이 오갈 정도라면 평소에도 경찰과 한전 측이 ‘원만한 공사’를 핑계 삼아 금품을 주고받았을 개연성이 있다. 이 대목도 당연히 철저하게 수사해야 한다. 이번 사건은 대규모 국책공사로 인한 분쟁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나름의 소중한 교훈을 남겼다고 본다. 주민들을 공권력으로 위협하고 금품으로 회유하는 방식은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다소 시간이 걸리고 힘이 들더라도 끊임없는 대화와 설득을 통해 진심에서 우러나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방식이 최선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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