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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당한 언설을 늘어놓는 일은 언론의 역할이 아니다. 하지만 상식이 외면받는 시대엔 어쩔 수 없다. 진부한 당위라도 재론해야 한다. 기소권을 독점하는 검찰이 1심 재판에서 무죄를 받았다면 항소하는 게 상식이다.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검찰이 상식과 다른 태도를 보이는 모양이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무죄에 대해 항소 여부를 망설이고 있다고 한다. 반면 환호작약해도 모자랄 원 전 원장은 “국정원법 위반 혐의도 무죄를 받겠다”며 일찌감치 항소장을 제출했다. 누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고, 어디가 범죄를 처벌하는 곳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대선 개입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11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징역 2년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뒤 취재진을 피해 법정을 나서다 기자들에 둘러싸이고 있다. (출처 : 경향DB)


지난 11일 ‘원세훈 대선개입 무죄’ 판결이 내려진 후 검찰은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판결문을 분석한 뒤 항소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원칙론이 전부였다. 앞서 검찰은 추석 연휴 전날 ‘직파간첩 사건’ 홍모씨에게 무죄가 선고되자 즉각 항소 방침을 밝힌 바 있다. 심지어 증거조작으로 무죄가 선고된 유우성씨 사건도 대법원에 상고했다. 원 전 원장 사건을 둘러싼 검찰의 침묵은 극히 이례적이다. ‘청와대 눈치보기’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원 전 원장의 대선개입 인정 여부가 박근혜 정부의 정당성과 직결되는 만큼 수뇌부가 부담스러워하는 듯하다. 원 전 원장을 법정에 세운 ‘채동욱 검찰’이 찍혀나간 뒤 ‘김진태 검찰’이 공소유지에 별 관심 없었던 걸 생각하면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러나 기본적 상식까지 배반해선 안된다. 검찰의 기소권은 주권자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이다. 자의로 공소를 제기할 권리가 없듯이 자의로 공소유지를 포기할 권리도 없다. 검찰이 항소를 포기하면 자기부정이자 직무유기가 된다. 정권을 대놓고 비호한다는 비판도 면할 수 없다. 검찰은 항소해야 마땅하다. 다만 여론에 밀려 ‘무늬만 항소’하는 식이 돼선 곤란하다. 원 전 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반드시 유죄를 받아내겠다는 의지와 복안이 뒷받침돼야 한다. 1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의 행위가 ‘선거 또는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해당할 여지가 있음은 별론으로 한다”고 밝혔다. 검찰이 적용한 선거법 85조(공무원의 선거관여 금지) 위반 혐의에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86조(공무원의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 금지) 위반 가능성은 남겨둔 것이다. 검찰은 86조까지 추가로 적용해 항소해야 한다. 검사는 특정 정권의 수족이 아니라 ‘공익의 대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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