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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2009년 11월 당시 철도노조 파업은 업무방해에 해당돼 유죄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예고된 파업은 업무방해죄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기존 대법원 판례와 상반된 결과다. 철도노조는 이명박 정부의 공공기관 선진화 방안에 따른 인력 감축에 반발해 파업을 벌인 혐의로 기소됐지만 1·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번 판결은 노조가 파업을 예고했다 하더라도 회사가 실제 강행할 것으로 예측하기 어려웠다는 게 유죄 판단의 근거다. 상식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다. 이런 논리라면 앞으로 회사가 “몰랐다”고 우기면 모든 파업은 불법이란 말인가. 대법원이 왜 이런 판례를 새로 내놨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번 판결은 업무방해죄 적용 요건인 ‘전격성’이 핵심이다. 파업 노동자에게 업무방해죄를 적용하려면 예고 없이 전격적으로 이뤄진 경우에만 처벌할 수 있다. 검찰의 기소권 남용을 막기 위해 대법원이 2011년 업무방해죄 적용 요건을 까다롭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판결은 “철도공사는 사업장 특성상 업무대체가 쉽지 않아 사측의 대응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 “파업을 강행하리라 예측하기 어려웠다고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전격성의 기준을 폭넓게 해석해 사용자 편을 들어준 것이다.

5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철도안전 확보·노조탄압 중단 간부결의대회'를 마친 전국철도노동조합 조합원들이 노조 탄압 중단 등을 촉구하며 명동성당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2011년 판례는 대법관 13명 전원이 모여 만든 전원합의체 판결이다. 이 판례를 수정하려면 다시 전원합의체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이번 판결은 기존 판례를 유지하면서 교묘하게 전격성 기준을 새롭게 해석한 셈이다. 전원합의체 판결을 대법관 4명이 모인 소부에서 뒤집은 것이나 다름없어 사법질서에도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권이 무력화되는 게 걱정이다. 이 판례대로라면 사실상 모든 파업을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구조다. 그동안 파업 노동자들에게 업무방해죄를 남용해온 검찰에게만 날개를 달아준 꼴이다.

노동 현실을 무시한 ‘역주행’ 판결에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 권익을 지키는 데 앞장서야 할 대법원의 존재 이유가 무색할 지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승태 대법원장 취임 후 갈수록 보수화되고 있는 판결 성향은 실로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차제에 노동권을 옥죄는 업무방해죄는 폐지하는 게 옳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파업을 업무방해죄로 처벌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언제까지 한국이 국제노동기구의 조롱거리로 남아 있을 순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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