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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한 소문을 낳던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올 국정감사에서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언급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회의록이 공개됐고, 블랙리스트에 9473명이 올라 있다는 보도도 잇따르고 있다. 명단을 공개한 인사는 “문체부 공무원들이 청와대가 내려보낸 ‘블랙리스트’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푸념을 들었다”면서 “어이가 없어 리스트 사진을 찍어 두었다”고 전했다. 문체부 전직 고위관리도 “청와대 지시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문건”이라고 했다. 문화예술인들도 ‘이미 알고 있던 얘기가 터진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지난해 11월 각 분야 문화예술인 60여명이 서울 한남동 테이크아웃드로잉에 모여 ‘예술검열 반대와 문화민주주의를 지키는 문화예술인 만민공동회’를 열고 정부의 문화예술에 대한 정치적 검열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A4 용지 100장 분량의 문건을 보면 기가 막힌다. ‘세월호 시국선언’ ‘세월호 시행령 폐기 촉구선언’에 참여한 문화예술인 및 문학인 1248명 외에도 문재인·박원순 지지 예술인 8125명의 이름이 빼곡히 들어 있다. 반정부·진보성향의 인사를 솎아내려고 고심 끝에 찾아낸 것이 ‘세월호’ ‘문재인’ ‘박원순’이란 키워드였다. 유치하기 짝이 없다. 1만명의 명단을 그대로 ‘오려 붙인’ 꼴이다. 일단 궁금증이 생긴다. 무려 1만명을 기피인물로 분류한다면 현 정부에 지지를 보내는 문화예술인은 대체 몇명이라는 것인가.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만든 블랙리스트는 각종 정부 지원사업에 살생부로 활용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예술검열의 사례는 끊이지 않았다. 홍성담 작가의 서울시립미술관 전시물이 일방적으로 철거되고, 대통령을 풍자한 연극을 연출한 박근형씨의 작품이 지원사업 공모에 선정되고도 지원금을 포기하라는 종용을 받았다. 또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이윤택씨의 희곡은 1위를 차지한 지원사업에서 탈락했다. 정부의 예술검열은 천안함·세월호 같은 정치·사회 이슈뿐 아니라 박정희·박근혜 대통령 비판 작품에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지금도 1만명에 가까운 명단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일일이 대조한다고 생각하면 소름 끼칠 노릇이다.
인신을 구속·고문하는 것만이 탄압이 아니다.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을 제약하고 나아가 스스로 검열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야말로 반민주적 탄압이다. 권력을 동원해 표현의 자유, 창작의 자유를 막는 나라를 민주주의에 기초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건 독재자가 통치하는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민주정부라는 자신이 있다면, 진상을 규명하고 블랙리스트 폐기를 선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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