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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화, 허다윤, 남현철, 박영인, 양승진, 고창석, 권재근, 권혁규, 이영숙…. 아직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 그대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진도 앞바다, 차가운 맹골수로에 갇혀버린 그대들의 꿈을 생각합니다. 4월16일, 슬프고 잔인했던 그 봄날을 다시 맞습니다. 노란 리본을 꺼내어 가슴에 달아봅니다. 리본 다는 손이 이내 부끄러워집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지나 또 한 번의 봄을 맞기까지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요.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 국가의 무능, 정부의 부재

2014년 4월16일, 그날의 풍경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TV 화면 속 대형 여객선은 기울고 있었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온 나라가 두 눈 뜨고 지켜보는데 곧 모두 구조되겠거니 생각했습니다. 대참사, 대재앙을 눈앞에 둔 줄도 모르고 편안히 점심을 먹었습니다. 상식은 그러나 배반당했습니다. 선장은 퇴선 명령이나 구호조치 없이 도망쳤습니다. 승객은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에 따르다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구조·수습 과정에서는 국가 위기관리 능력의 총체적 부실이 드러났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사고 발생 7시간이 다 되도록 회의를 주재하거나 대면보고를 받지 않았습니다. 해경은 사고 해역에 도착하고도 선체 진입 등 적극적 구조를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탑승·구조·희생자 집계는 발표와 수정을 거듭하며 혼선을 빚었습니다. 정부는 시민의 생명과 안전, 복지를 책임지는 대가로 통치권을 행사합니다. 세월호 참사에서 실질적 의미의 정부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무능하고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공무원들만 우왕좌왕했을 뿐입니다. 결국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304명 가운데 단 한 명도 살리지 못했습니다. 절망한 가족, 분노한 시민은 묻고 또 물었습니다. 이것이 나라인가, 이것이 국가인가를.

고통과 탄식 속에서 자성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대통령부터 필부필부에 이르기까지 눈물 흘리며 ‘4·16 이후’를 말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시간은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고 했습니다. 생명과 안전보다 이윤과 효율을 중시했던 사회를 밑동부터 뜯어고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잠시였습니다. 분향소에서 국화꽃 한 송이 바치려 기다리던 대열이 어느 결에 줄었습니다. 애통의 자리엔 야만이 똬리를 틀었습니다. ‘세월호 피로증’을 언급하며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하는 가족들 앞에서 ‘폭식투쟁’으로 조롱하는 이도 나타났습니다. “진상규명에 유족의 여한이 없도록 하겠다”던 대통령은 40일 넘게 곡기 끊은 ‘유민 아빠’ 김영오씨에게 위로 한마디 건네지 않았습니다. ‘안전 대한민국’이 멀어져간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 모릅니다. ‘관피아(관료+마피아)’가 빠진 자리엔 ‘정피아(정치인+마피아)’가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고양종합터미널과 장성 요양병원에서 불이 나고, 판교에선 환풍구가 무너졌으며, 베링해에선 오룡호가 침몰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결과는 참혹합니다.

그러나 희망의 여린 싹도 보았습니다. 오로지 진실을 캐내기 위해 거리에 선 세월호 가족들이 그 증거입니다. 국가의 무능과 정치의 부재 속에 온갖 고통과 비난을 감내하며 싸워온 이들에게서 인간적 존엄을 보았습니다. 이들의 아픔에 공감한 시민 600여만명이 특별법 제정 요구 서명운동에 참여했고, 수만명이 서울 광화문에서, 혹은 각자의 일터에서 동조단식에 참여했습니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킨 사람들이며, 슬픔과 분노를 개개인의 각성으로 승화시킨 사람들입니다. 살아남은 이들의 책임을 다하는 실천가들입니다.


■ 바닷속 잠긴 진실 인양해야


문제는 다시 국가요, 정부일 것입니다. 정부는 사랑하는 혈육을 잃은 사람들에게 돈봉투를 들이밉니다. 진상규명에 절실한 선체 인양에 대해선 자꾸 말을 바꿉니다. 박 대통령이 “적극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박인용 국민안전처 장관은 “인양의 위험과 실패 가능성을 충분히 알리고서 결정해야 한다”고 합니다. 세월호 가족이 철회를 요구하고 있는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안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이 어제 “원만한 해결”을 지시했으나 정부와 새누리당은 ‘부분 수정’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경찰은 집회에 나선 유가족에게 최루액을 뿌리더니, 오늘 열리는 추모집회엔 차벽을 설치하겠다고 공언합니다. 그리고 대통령은 1주기인 오늘 중남미 4개국 순방을 떠납니다. 참으로 낯두꺼운 정부입니다.

세월호 참사는 목숨을 잃은 304명과 그 가족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어느 누구도 세월호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깊은 바닷속에 잠긴 진실을 인양하지 않고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라틴어 사전에서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고 합니다.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면 다시 약속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자 선 자리에서 약속을 이행해야 합니다. 선체를 인양하고 진상을 파헤치고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무책임하고 무능한 정부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시민뿐입니다. 세월호 참사는 ‘현재진행형’임을 잊어선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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