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지난 23일 9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한국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긴 거목의 퇴장을 애도한다.

김 전 총리만큼 부침과 영욕이 교차한 인물도 드물다. 비록 박정희 정권의 2인자로 권력을 누렸지만 그가 한국 정치에 남긴 공적이 적지 않았다. 한국 정치 사상 처음으로 중앙당·사무처 중심의 정당 시스템을 도입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반대했다. 10·26 직후 체육관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1980년 ‘서울의 봄’을 열었다. 내각제를 필생의 화두로 삼아 추진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이런 그를 온전한 민주주의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5·16 군사쿠데타의 기획자로 헌정질서를 무너뜨린 것은 두고두고 그의 정치 역정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의 손에 의해 창설된 중앙정보부가 군사독재 정권 내내 민주주의를 압살하는 것을 막지 못한 것도 씻을 수 없는 실책이었다. 한·일 수교로 산업화 자금을 마련하고 막혔던 양국 간 외교의 문을 열었다고 하지만 당시 굴욕 외교 시비는 지금까지도 한·일 양국 사이는 물론 국내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 고인에 대한 정부의 훈장 추서 방침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 이런 평가를 반영한다.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과 달리 군사쿠데타로 민주주의를 지체시켰다는 평가 때문이다. 그 누구도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원칙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고인의 정치 역정이 웅변하고 있는 셈이다.

24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이 조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1990년 3당 합당과 1997년 대선 당시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손잡고 정권을 창출한 DJP 연합은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현실 정치인으로서 면모를 보여주었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씌운 친북 혐의를 불식시키면서 역사상 첫 평화적인 여야 정권교체를 이뤄낸 것은 역사적 타협이었다. 고인의 대화와 타협의 정신은 극단적 대결로 평행선만 긋는 현 정치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만년의 정치 역정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많다. 자유민주연합을 창당, 제3지대의 가능성을 시험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지만 충청지역을 자신의 정치에 이용함으로써 지역주의를 심화시켰다는 비판이 더 많다. 원로 정객으로 정치 발전을 견인하지 못한 점도 유감스럽다.

운정(雲庭), 곧 ‘구름이 머무른 뜨락’이라는 아호처럼 고인은 예술을 아는 정치인이기도 했다. 정치적 고비마다 그가 남긴 언어는 삭막한 현실정치의 품격을 한 단계 높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견제에 외유를 떠나며 던진 ‘자의 반 타의 반’ 한마디는 지금 들어도 낭만적이다. 수준급 서예가이자 화가이기도 했던 그는 문화예술 사랑을 정책으로 실천했다. 평생의 독서 습관은 그에게 르네상스 교양인이라는 별칭을 주었다. 욕설 수준의 논평과 위트 없는 독설이 난무하는 지금의 정치권이 새겨들을 대목이다.

고인이 갈망한 ‘조국 근대화’는 성취했지만 한국 사회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극복하고 타협의 정치문화를 만들 책무가 정치권에 있다. 고인은 스스로 지은 묘비명에서 “한 점 허물없는 생각(思無邪)을 평생 삶의 지표로 삼았다”고 썼다. 오로지 시민을 향한 정치를 펼치라는 말이다. 영원한 2인자, 정치 9단, 여백의 정치인 JP가 떠났지만 정치권은 그의 유산과 말을 새겨야 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