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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면서 “비상시국에 난무하는 비방과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들은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지인인 최순실씨가 미르재단·K스포츠재단의 설립과 운영에, 그리고 안종범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이들 재단의 출연금 모금 과정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두고 한 말이다. 그동안 청와대 대변인이 “근거 없는 부당한 정치공세”라며 부인하더니 이젠 대통령이 나서서 역공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최고지도자가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관대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이 22일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면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우병우 민정수석, 안종범 정책조정수석. 청와대사진기자단

박 대통령의 바람과는 거꾸로 최씨를 둘러싼 비리 의혹은 점차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어제 한겨레신문은 지난 7월 이석수 청와대 특별감찰관이 안 수석이 K스포츠재단 모금에 관여했다는 제보를 받고 내사를 벌였다고 보도했다. 조사관들이 돈을 출연한 기업 관계자들에게 돈을 내게 된 이유를 묻자 한숨만 쉬었다는 구체적인 증언도 나왔다. 대기업들이 출연금을 내는 과정에 강제성이 있었다는 점을 시사하기에 충분하다. 박 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제대로 알고 ‘비방’이니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이니 하는 말을 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박 대통령은 어제 의혹을 제기하는 쪽을 비판하며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에 맞서 우리 국민이 하나가 되어야만 한반도 평화와 민족의 미래를 지켜낼 수 있다”는 말도 했다. 기업을 옥죄어 재단에 800억원이나 출연하게 한 비리의혹과 북핵·미사일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북핵 대응을 위해 비리 의혹을 덮어야 한다는 말인가. 합리적 의심을 제기하는 여론을 존중하기는커녕 여론과 싸우려는 대통령의 태도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박 대통령의 어제 발언은 정치권과 검찰 등을 향해 최순실 사건을 건드리지 말라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나 다름없다. 예상대로 새누리당은 즉각 권력형 비리 의혹을 제기하는 야권을 향해 “무책임한 폭로 정치에 사로잡혀 민생을 외면하고 있다”고 반격하기 시작했다. 국회에서 관련 증인을 채택하려고 하자 집단적으로 회의를 보이콧하겠다는 위협도 했다. 민심을 청와대에 전하지는 못할망정 청와대를 위해 방어벽을 치고 나선 꼴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이런 지시는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할 뿐이다. 우병우 민정수석에 이어 안 수석까지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들이 줄줄이 비리 의혹의 중심에 섰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국정을 제대로 이끌 수 있을까. ‘비상시국’을 자초한 것은 바로 박 대통령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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