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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법관 10명 중 9명이 대법원장과 법원장의 정책에 반하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우리 헌법과 법률은 법관이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할 수 있도록 법관 독립을 보장하는 다양한 장치들을 마련해 두고 있다. 그런데 법관들은 되레 사법부 외풍이 아닌 내부로부터의 법관 독립 침해를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충격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조사는 법원 내 최대 학술단체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주도해 이뤄졌으니 신뢰할 만하다. 현직 법관들을 대상으로 한 인사제도 관련 설문조사는 좀체 드문 일이다.

법관들은 독립을 침해하는 주요인으로 ‘제왕적 대법원장’과 ‘사법부 관료화’를 지적했다. 이들은 법관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개선이 필요한 분야로 ‘승진·전보·선발성 보직 등 인사 분야’(89%), ‘평정·재임용 등 직무평가 분야’(72%)를 꼽았다.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권도 수정해야 한다는 의견(71.6%)이 압도적이었으며 그 방법으로 대법원장의 관여를 줄여야 한다(64.3%)고 했다. 그동안 대법원장의 인사권 독점이 일선 법관들의 통제 도구로 활용된다는 지적은 끊임없이 제기돼 왔지만, 판사들의 목소리로 새삼 확인된 셈이다. 대법원장은 법관 인사, 해외연수 선발, 법원장 임명, 대법관 임명제청 등 말 그대로 제왕적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개별 법관들은 법원장의 인사 평정을 의식할 수밖에 없고, 법원장들은 대법원장의 눈치를 보기 때문에 대법원장이 3000여명에 이르는 전체 법관에 대한 영향력 행사가 가능한 구조인 것이다.      

법관들은 과거 독재권력에 맞서 사법권 독립을 위해 치열한 투쟁을 벌여왔다. 그 결과 재판 독립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등 사법부 독립의 외양은 갖췄지만, 정작 속으로는 사법부 수뇌부의 눈치를 살피며 곪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법원행정처는 인권법연구회의 이번 학술대회를 축소하라는 압력 행사로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이제 보니 판사들의 이런 자가 진단 내용이 바깥에 알려지는 게 두려웠던 모양이다.

법관의 독립성은 시민들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판사들마저 윗선 눈치보기에서 자유롭지 않은 분위기라면 보통 일이 아니다. 이런 상태에서 진정한 사법부 독립은 이뤄지기 어렵다. 이제 진단은 나왔으니 수술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대법원장에게 집중된 권한을 분산시키는 게 중요하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듯 이를 사법부에만 맡겨둬선 안된다. 독일은 법원이 사법부 독립을 주도하는 게 아니라 행정부와 의회, 법관 대표기구 등이 참여한다. 대법원장 전권 아래 놓인 대법관 추천 방식도 선진국처럼 시민·사회 의견을 거치도록 바꿀 필요가 있다. 사법부는 이번 조사를 계기로 사법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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