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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여 진행했던 강의를 마쳤다. 편집 핵심 업무에 대한 연속 강의였다. 편집자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니, 뭔가 그럴듯한 직업적인 노하우, 이야기를 들려주리라 기대한 수강생도 있었으리라. 그런데 어디 직업에 관한 정보와 지식이 그렇게 산뜻하게 정리되는 것이란 말인가. 다만 책 만들었던 경험과 실제 사례를 과장 없이 전하려고 노력했다.

강의는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즐거움이었다. 연기자에겐 ‘카메라 마사지’가 있다고 했던가. 강사에게는 ‘눈빛 마사지’가 있다. 40여 명의 출판계 수강생들이 쏘아주는 눈빛의 생기 때문에 몸에 새로운 기운이 스며든 것도 같았다. 돈과 시간, 눈빛을 내게 선물로 내준 수강생들에게 무엇으로 답했던가.

책 문화의 격동을 함께 겪는 출판인들끼리 동료 의식도 있었다. 저자를 만나는 법, 기획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 법, 편집 디자인의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 독자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에 대한 편집자 공동의 고민은 강의 내내 지속되었다. 강의를 마치던 날, 수강생의 마지막 질문은 “편집자는 언제 독립, 창업해야 할까요”였다.

쉬운 답을 내기 어려운 질문이었지만, 일단 나의 일성은 ‘절실할 때’였다. 현재 하고 있는 자신의 업무가 임계점에 다다랐음을 몸과 마음이 알 때가 있을 것이라고, 바로 그때가 창업해야 할 때라고 답했다. 이는 흡사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줄 것이라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추상적인 답이었을 것이다. 이내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독립할 때를 떠올렸다. 매일 아침 하늘의 날씨보다 여러 기획과 편집 관련 서류를 결재하는 경영자의 신상 날씨에 관심을 더 많이 쏟게 될 때, 책이란 무엇인가나 좋은 편집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을 고민하는 편집자 정체성보다 일의 안배는 어떻게 해야 효율적인가, 마케터가 제안한 시장 흐름과 맞는 출간 일정 조정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등 관리자 정체성이 강화될 때 독립을 생각해야 한다.

사실 책 편집 행위에는 타깃 독자 설정이나 홍보 방향, 손익분기점 계산 등 경영과 관련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편집자가 당연히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고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책의 본질보다 앞서는 고민에 시달려서 정작 책 생각을 덜 하게 되는 상황에 처하면, 기왕에 그렇게 경영 차원의 생각에 몰두할 것이라면 독립해서 자신의 취향과 가치관에 충실한 출판사를 운영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사실 이런 강의실 문답은 매우 긍정적인 차원의 것이었다. 편집자 자신이 독립을 원해도 못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으니까.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의 1인 출판사 수는 점점 많아지고 있다. 독립을 꿈꾸는, 자신의 회사를 갖고 싶어하는 편집자가 많아져서인가. 아니다. 책과 관련된 진지한 고민을 지속할 수 없게 만들고 쌓이는 경력을 부담스러워하는 회사가 슬그머니 베테랑 편집자를 밖으로 밀어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스갯소리로 정작 1인 출판사를 차려놓고 보니 매출이 오르지 않아 내고 싶은 책을 낼 수 없고 하여 다른 출판사의 외주 편집 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말도 퍼져 있다. 자신의 출판사를 차린 대표가 다른 출판사의 편집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우스꽝스럽지만 이 또한 현실이다. 1인 출판사 대표가 프리랜서 편집자를 겸한 투잡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작은 출판사를 옹호해 왔다. 한 사회에 폐활량 큰 호흡으로 다종다기한 책들을 쏟아내는 규모 큰 출판사는 필요하다. 안정감 있는 기획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출판 행위를 통해 사회적 반향을 부르는 책들이 나올 수 있으니까. 그러나 모든 책이 그렇게 한 사회의 의제가 될 거대 담론의 매체일 수는 없다. 독자로서 출판사 브랜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양한 출판물, 다양한 저자 생각이 자유롭게 펼쳐지는 것이다.

1인 출판사가 소중한 것은 개성껏 책을 낼 수 있다는 것.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소신껏 책을 낼 수 있으니까. 돈 눈치만 보지 않을 수 있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돈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작은 출판사라고 유통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을 수 있다면 가능하다. 도서관에서 제대로 책을 구입해 비치해준다면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다. 종수를 많이 늘리지 않아도 한 권 한 권 손해를 보지 않고 차근차근 리스트를 쌓을 수 있다.

독립하면 만세를 부르고 싶은데 망국 타령을 할지도 모를 미래의 출판사 대표여, 이렇게 함께 기원하자. 서점이여, 제발 망하지 마오. 도서관이여, 세금 내는 누구나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구입해서 비치해줘요. 국가여, ‘업자’들이 알아서 하라고 하지 말고 책에 대한 고민을 나누어주어요. 좋은 책을 낼 테니!

정은숙 |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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