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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아는 사람이 보낸 문자메시지나 e메일에서는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말투뿐이랴. 몸짓, 성격이 다 떠오른다. 이번에도 그랬다. ‘형……’ e메일 제목이 한 단어였는데도 메일을 보낸 후배의 억양과 표정은 물론 뒷모습까지 눈앞에 어른거렸다. 후배는 웃을 때, 두 눈이 단추 구멍만큼 작아지고 입은 주먹 하나가 들어갈 만큼 커지곤 했다. 책에 대한 애정은 누구보다 컸지만 자기 삶에 대해서는 더없이 소탈한 친구다. 연전에 만났을 때, 새치가 나보다 많아 가슴이 짠했더랬다.

메일을 열기 전, 말줄임표에 눈이 갔다. 말줄임표가 더 많은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래서 나도 가끔 말줄임표에 기댄다. 어쩌다 고민거리가 생기면 선배에게 문자를 보낸다. ‘형……’ 그러면  얼마 안 있어 전화벨이 울린다. 그런데 내가 후배한테서 저런 문자를 받으면 선뜻 연락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후배들의 하소연에 귀 기울여주지 못하는 못난 선배라고 자책할 때마다 그 많은 후배들의 부탁을 다 들어주던 몇몇 선배의 넉넉한 품이 얼마나 대단해 보이는지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말줄임표 뒤에 이야기가 있었다. 메일을 열어보니 아들 얘기부터 나왔다. 지난해 아들이 대학에 들어갔는데 일시불로 내야 하는 기숙사 비용을 대기조차 힘들었다는 것이다. 아, 후배의 흰머리가 더 늘었겠구나. 내가 먼저 연락을 했어야 하는 건데. 후배가 세계 최초로 24시간 책 전문 케이블방송을 하겠다며 열변을 토하던 때가 5년 전이었다. “바둑, 낚시, 골프 전문 채널은 있는데 책 전문 채널이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2012년 말, 서울 광화문 언저리 호프집. 후배의 날선 문제제기와 선명한 청사진 앞에서 나는 대꾸다운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건 1인 시위’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후배는 2003년부터 운영해온 책 전문 인터넷 사이트를 기반으로 2013년 4월 드디어 책 전문 채널 ‘온북TV’를 개국했다. 그의 1인 시위는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범우사, 김영사, 문학동네 등 32개 출판사와 서점, 유통업계 그리고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을 비롯한 관련 단체와 시민들도 책 방송 설립에 동참했다. 파주출판도시는 스튜디오 공간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지난 4년, 온북TV는 힘차게 달려왔다. 일본,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 열린 도서전을 영상에 담았고 한국문학번역원이 주관하는 ‘우리 작가 해외 홍보영상’(신경림 시인 등 20인)을 제작했다. 2015년에는 인천시가 유네스코로부터 ‘세계 책의 수도’로 지정된 것을 기념해 인천지하철에서 ‘달리는 북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국어교과서 속 작가 소개, 전국 독서동아리 탐방 시리즈도 엮어냈다. 최근에는 도매상 부도 여파로 신음하는 출판계를 돕고자 ‘책선물 우체통’ 이벤트를 펼치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해 위기가 닥쳤다. 정부 지원금이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송출료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 몇 달 계속돼 방송이 중단될지 모르는 최악의 사태와 마주쳤다. 설상가상으로 파주출판도시에서도 나와야 했다. 카메라를 들고 동가식서가숙해야 했다. 후배는 “지난해 12월 방송을 접으려 했다”고 적었다.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차에 정부에서 다시 지원을 하겠다는 통보가 왔다. 도움을 주겠다는 분도 나타나 서울 구로동에 사무실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재기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후배는 지난 4년을 찬찬히 돌아보았다고 했다. 매체의 자생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실책이었다. 경영의 안정성뿐 아니라 책 전문 채널로서 ‘킬러 콘텐츠’를 개발하지 못한 것도 안타까웠다. 재정이 탄탄했다면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내놨을 것이다. 반대로, 의미 있는 콘텐츠가 잇달았다면 경영이 원활했을 것이다. 시너지를 내지 못하면 악순환이다. 그렇다고 온북TV 4년이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책 방송의 가능성을 직접 확인한 것이다. 최근에는 전 세계 4000만가구가 가입한 애플TV에 콘텐츠를 제공하기로 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영상이 오는 5월부터 애플TV를 통해 전 세계 시청자와 만날 예정이다.

하지만 후배는 마음을 굳힌 듯했다. ‘직지의 나라’에서 설립한 세계 최초 24시간 책 전문 채널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것이다. 이제 이름을 밝히는 게 도리이겠다. 메일을 보내온 후배는 온북TV 조철현 사장이다. 조철현 사장은 최근 출판 관련 단체에 서신을 발송했다. 조 사장은 서신에서 “언제든 물러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며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와 한국출판인회의와 같은 대표성을 가진 단체가 책 방송을 운영해 주십사고 당부했다. 올해는 출협이 창립된 지 70년이 되는 해다. 조 사장은 출협 7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2004년 이후 촬영해온 4000시간 이상의 중요한 영상물을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조 사장은 다음과 같은 독백으로 메일을 마무리했다. “조철현, 수고했다. 이제 떠나라, 아무 조건 없이.” 메일을 읽고 멍해져 있는데 문득 반려견 전문 채널이 생각났다. 검색해 보았더니 ‘개의 심리적 안정과 스트레스 해소’를 목적으로 하는 ‘도그티비’는 공교롭게도 온북TV와 같은 해인 2013년에 방송을 시작했다. 후배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형, 반려견을 위한 방송이 있는 나라에서 인간의 지성과 감성을 살찌우는 책 방송은…….’ 이 못난 선배는 아직 답신을 못하고 있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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