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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웃음이 터졌다. 1989년 가을 서울 탑골공원 뒤편 ‘게이 까페’에서 인류학 현지조사(Field Work)를 할 때 들었던 말이다. “죄송합니다. 마마.” 지난 15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삼성동 자택을 찾은 60대 할머니는 “원통해서 3일을 굶었다”며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마는 옛날 왕과 그의 처·첩을 높여 부른 극존칭이다. 상감마마·중전마마·대비마마 하는 식이다. 한국의 게이들도 연배 높은 전설적인 선배들에게 그 ‘마마’를 붙인다. 현대사에선 사라졌다 싶은 단어를 28년 만에 들었다. 청와대를 나온 ‘삼성동 마님’은 아직도 누군가에겐 공주였고, 여왕이었다.

기는 한풀 꺾여 있었다. 얼굴은 부어 있었다. 새벽 4시30분 집에 불이 켜졌다니까 전전반측했음이리라. 그럼에도 21일 눈 쏠린 서울중앙지검 포토라인에서 그는 8초 만에 입을 닫았다. “송구스럽고, 성실히 조사받겠다.” 청와대 나올 때 대독시킨 네 마디는 두 마디로 줄었다. 무엇이 왜 미안한지는 없고, 상처 받은 대한민국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21시간 만에 검찰청사를 나서는 얼굴은 지쳐 있었다. 밤 새워 진술조서 열람에만 7시간을 매달린 뒤였다. 굳은 얼굴은 삼성동의 지지자 앞에서 잠깐 웃고, 다시 창문도 열지 않는 칩거에 들어갔다. 밀리는 ‘죄’와 버티는 ‘정치’가 교차한 혼군(昏君)의 하루였다.

그로선 혹이 붙었다고 느꼈을 터다. 검찰 특별수사본부가 적용한 8개 혐의는 특검 90일을 돌아오며 14개로 늘었다. 재벌의 손을 비튼 강요가 뇌물로 커졌고, 블랙리스트도 더해졌다. 검찰과 특검에 약속한 대면조사와 압수수색을 거부하고, “어거지로 엮었다”며 버틴 넉 달의 부메랑이다. 그새 안종범의 수첩은 또 한번 무더기로 발견됐고, 압수된 최순실의 태블릿PC도 2개로 늘었다. 재청구된 영장이 더 촘촘해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처럼, 박 전 대통령 혐의도 구를수록 커지는 눈덩이였다. 때로 최순실이 써준 말과 레이저 눈빛으로 눌렀던 회의, 대면보고 물리고 관저에서 팔이 아플 정도로 한 대포폰 통화는 그가 법정에서 마주칠 업보다. 대통령은 시민으로, 참고인에서 피의자로, 국정농단의 ‘공범’에서 ‘주범’ 위치로 바뀌었다. 그 운명의 끝은 검찰 손에 쥐어졌다.

검찰을 보는 시민들의 눈은 매섭다. 자초한 일이다. 특수본이 서초동에 차려진 것은 지난해 10월27일. 검찰은 대통령이 최순실의 존재를 실토하고(25일), 여당까지 특검 당론을 채택한 후(26일)에야 움직였다. 미르·K스포츠 재단의 772억원 기업 입금표에 더해 최순실의 ‘독일 빨대’ 회사 비덱스포츠, 정유라의 입시부정, 차은택의 광고회사 포레카 강탈까지…. 수사 단서와 속보가 도처에 던져진 때였다. 검찰의 늑장·부실 수사가 특검을 부른 것이다. “김기춘·우병우 라인을 가려내는 일이었다.” 훗날 박영수 특검이 팀을 짜며 가장 신경썼다고 털어놓은 말이다.

불신은 더 깊고 오래됐다. 검찰의 흑역사가 될 진경준·홍만표·김대현 사건이 꼬리 문 것은 작년 5월부터다. 스폰서 친구에게 120억원대 주식을 받은 현직 검사장, 개업 16개월 만에 110억원을 번 ‘전관’ 변호사, 상소리로 모욕 주며 후배 검사를 ‘운전셔틀’시킨 부장검사의 민낯이다. 기소독점과 상명하복 문화가 오도한 ‘인명재검(人命在檢)’의 적폐들이다. 검사들의 막후 세상을 그린 영화 <더 킹>엔 명대사들이 나온다. “이슈가 이슈를 덮는다.” “내가 역사야 이 나라고.” “그냥 권력 옆에 있어.” 차기 대통령을 점치고 굿까지 하는 검사들을 보며 사람들은 끄덕인다. 권력의 생노병사에 기민하고, 난세엔 피 냄새를 좇는 상어떼처럼 ‘조직’으로 뭉쳐가는 검사공동체가 그들이었다. 잘생긴 배우들만 가리면, 영화는 현실이다. 홍경식(경남 마산)의 10개월만 빼면, 박근혜 청와대의 민정수석은 TK라인(곽상도-김영한-우병우-최재경-조대환)이 바통터치했다. 후배를 키운 길은 라인이 되고, 선배는 전관이 됐다. 그렇게 검연(檢緣)과 지연이 얽힌 TK 정권의 서초동 9년도 저물고 있다.

‘2기 특수본’의 칼이 떨고 있다. 박근혜 수사는 뱉은 말을 주워담지 않는다면 직진(구속영장)을 피할 명분과 퇴로가 없다. 이미 최순실 재판에서 “증거는 차고 넘친다”고 공언했던 터다. 박근혜 다음에 만날 우병우도 또하나의 깔딱고개다. “최순실을 모른다”며 차라리 무능을 택한 ‘법꾸라지’ 수사는 안으로 칼을 겨누는 일도 생길 수 있다. “판이 벌어졌는데 칼을 못 잡는다면 그건 더 이상 칼잡이가 아니지.” 박영수 특검이 운명처럼 ‘특검 제안’을 받아들였다며, 주위에 한 말이다. 검찰도 알고 있다. 이 봄이 지나면 숱하게 말로 했던 회개·자정·개혁 의지가 모두 심판대에 선다는 것을…. 무엇을 재고 있을까. 죄업 쌓인 검찰이 작두 위에 올라섰다.

이기수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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