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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12일은 시민혁명의 날이었다. 서울 도심을 밝힌 100만 평화 촛불은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퇴진이 시민의 명령임을 분명히 보여줬다. “이게 나라냐”는 분노를 넘어 “이게 민심이다”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박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3차 주말 촛불집회는 규모로도, 내용으로도 역사에 남을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줬다.

가족이나 연인, 중고생 등 참가자 범위가 넓어졌고 시위는 축제를 방불케 했다. 박 대통령의 출신 고교인 성심여고 학생들은 무대에 올라 “선배님 같은 후배가 되지 않겠다”고 했다. 시민들은 나뒹구는 쓰레기를 줍고 길바닥에 떨어진 촛농까지도 휴대전화 손전등을 비추며 긁어냈다.

2016 민중총궐기 대규모 3차 촛불집회가 열린 12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며 촛불을 밝히고 있다. 정지윤기자

서울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재외 교포들도 같은 시간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많은 참가자들이 “집회에 처음 나왔다”고 했다. 국가의 기본을 무너뜨린 데 대해 남녀, 세대, 지역, 이념을 떠나 모든 시민이 분노했다. 박 대통령이 진정한 국민대통합을 이뤄냈다는 조롱은 웃을 수만은 없는 역설이다. 법원은 청와대 지근거리인 율곡로까지의 행진을 처음 허용하며 집회권을 보장했고, 경찰도 시민들과의 충돌을 피하며 안전관리에 힘썼다. 한국사회의 성숙함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100만 촛불에 담긴 분노를 보고도 여전히 미몽 상태에 빠져 있다. 청와대 정연국 대변인은 어제 “대통령께서는 국민 여러분의 목소리를 무거운 마음으로 들었으며 현 상황의 엄중함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국정을 정상화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지금 대통령으로서 무슨 역할을 더 할 것이며, 고심을 하고 말고 할 게 무엇이 있는가. 대통령은 시민들의 저항 수위에 따라 한발 한발 뒤로 물러서며 찔끔 사과와 꼼수 수습책을 내놓았지만 민심은 더욱 차갑게 돌아섰다는 걸 시민의 촛불로 입증했다.

100만 촛불에서 확인된 민심은 분명하고 단호하다. 단 하루, 한 시간도 박 대통령의 시민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나라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박 대통령은 당연히 물러나야 하며 그 길만이 사태 해결의 출발점이란 것이다. 1년3개월 남은 임기 동안 박 대통령에게 국정을 맡길 수 없는 것은 물론 2선에 머문다는 것 자체도 나라의 혼란을 더욱 부채질하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무엇을 한들 믿지 못하고, 그가 무슨 말을 해도 그 문장은 누가 써주었는지 의심하는 게 시민 정서다.

국정 정상화 운운하는 대목에선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지난 4년간 시민들이 맡긴 권력을 개인에게 넘겨 연설문 작성부터 외교안보에 이르기까지 꼭두각시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이미 국정은 비정상이었고 대통령은 없었는데 도대체 무엇을 정상화시키겠다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집권당이라는 새누리당도 신뢰를 잃은 지 오래다. 말로만 촛불 민심을 준엄하고 무겁게 받아들이겠다면서 자리 보전에만 급급하니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여당뿐 아니라 청와대, 정부, 검찰 내 최순실 부역자들은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

박 대통령의 퇴진은 혼란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새로운 시작이다. 헌법과 국가, 정의와 역사, 미래를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다. 촛불 민심은 대통령 퇴진을 넘어 우리 사회 새로운 질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자는 열망을 담고 있다. 촛불은 대통령 퇴진 요구로 시작했지만 촛불의 종착지는 새로운 체제, 새로운 나라, 새로운 시대로 향할 것이다.

4·19혁명부터 6월항쟁까지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되살려온 주인공들은 항상 시민이었다. 시민들이 있었기에 헌정을 유린한 어떤 독재 치하에서도 이 나라를 지탱해올 수 있었다. 시민들은 또다시 민주공화국을 복원시키고 헌법 제1조에 따라 국민이 주인인 시민권력 시대를 열 것이다.

이제 박 대통령은 나라를 ‘비선 놀이터’로 만들고 국정을 망가뜨린 벌을 스스로 청해야 한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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