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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헌법이다. 유사 이래 최대의 집회로 기억될 민중총궐기에서 우리는 100만개의 촛불과 100만개의 헌법전을 목도한다. 그것은 저항권이라는 고루한 법용어에 그치지 않는다. 침탈당한 주권을 되찾기 위한 항의의 수준을 넘어 그 주권이 담아내어야 할 내일의 세상을 도모하는 우리 모두의 외침이기 때문이다.

한 외신이 ‘공동통치’(mitregieren)라 이름하였다는 대통령과 그 일행의 막장 스캔들은 문제의 시작일 뿐이다. 암종의 뿌리는 청와대와 고위공무원과 정치권과 검찰과 언론과 재벌, 심지어 학계에까지 펼쳐진 이 땅의 모든 권력에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향해 공모하고 담합하여 비선조직으로 국정을 농단하며 세상을 우롱하였다. 샤머니즘이나 말타기와 같은 ‘창조’적 문화는 그로 인한 구정물들이 모여드는 하수구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요구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촛불과 휴대전화를 들어 보이고 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그저 돈이 되고 권력이 부가될 수 있으면 어떤 것이라도 이 창조의 이름에 값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작금의 사태는 생각없는 대통령의 작품이자 동시에 그러한 대통령을 간택하고 그를 통해 마지막 금전, 최후의 권세까지도 쥐어짜내는 이 권력연합의 공동작업물이다. 한마디로 그들의 세상은 아귀축생의 본능만이 횡행하는 탐욕국가 그 자체였다.

사실 이런 모습은 1987년의 헌법에 이미 잠재되어 있었다. 당시 치열한 투쟁에 나섰던 대중들이 스스로를 정치주체로 조직하기도 전에 신군부와 3김의 타협에 의해 1987년 헌법이 던져지듯 만들어졌다. 그러기에 대통령에게 국가원수 운운하면서 국헌수호와 국토보전이라는 최고의 주권적 권한까지 일임해 버린 저 사악한 ‘유신헌법’의 잔재도 떨쳐버리지 못한 채, 대통령‘중심’제라는 전대미문의 권력체제를 잔존시킬 수밖에 없었다. 국민의 가열찬 정치의식에도 불구하고 국민발안이나 국민투표, 국민소환 혹은 납세자의 권리나 지방분권 등 국민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국정운영 주체로 받아들이는 시도조차도 제대로 해볼 수 없었다.

민주화라는 빛 좋은 슬로건과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개살구 같은 단어에도 불구하고 정치는 언제나 그들의 것이었고, 굴종은 오직 국민에게만 강요되었던 연유도 여기에 있다. 신자유주의의 깃발 아래 재벌·대기업과 정치권력이 정경유착의 새로운 끈을 마련하고, 보수언론과 퇴락한 학술계가 뒷받침하는 구도는 이런 대중소외의 전략 속에서 이룩됐다. 광장의 정치를 국가의 정치로 대체하면서 길거리 선남선녀들을 그저 통치의 대상으로, 국가의 타자로 내쳐버림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작금의 스캔들은 이런 권력연합에 압도당한 1987년 헌법 체제가 속으로 곪아 터지면서 드러난 것들이다. 국민을 배제한 채 그들만의 리그로 진행되는 정치체제가 봉착하게 되는 필연의 결과인 셈이다. 그러기에 “국정에서 손 떼라”라는 구호는 사태의 본질에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대통령의 국헌유린 행위에 대한 응징에 현저히 못 미친다. 그뿐 아니라, 대통령의 독직·부정행위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시스템과 그것을 이용하거나 방조·방임하면서 좀비적 탐욕에 몰두한 이 국가체제를 교정해 나가는 데 아무런 방책도 되지 못한다.

100만개의 촛불은 가장 엄중한 응징이자 최선의 대안이다. 동시에 100만개의 촛불은 ‘그들의 정치’가 아니라 ‘우리들의 정치’를 간절히 요청한다. 그것은 비선으로 해체되어버린 대통령직을 원상태로 되돌려 놓고, 사적 탐욕으로 유린된 정책과정들을 합법성과 민주성과 책임성을 갖춘 정상국가로 되돌려 놓자는 국민적 명령이다. 그뿐 아니다. 국가의 최중심에 우리의 함성이 자리하게끔 하는 것, 그래서 1987년의 오류를 딛고 민주공화국의 진정한 주체로 곧추서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다.

100만개의 촛불은 새로운 헌법명령으로 자리 잡았다. 이 촛불들은 광장에서 국가로 넘어간 우리들의 다양한 주권들을 다시금 광장으로 소환한다. 여기서 헌법개정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헌법의 본체를 구성하고, 헌법이 세상에 명령하도록 하는 주체의 지위를 우리가 되찾아내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들이 독점하고 있던 헌법을, 그들이 전횡하던 국가권력을, 이제는 우리가 주인이 되어 우리의 것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촛불들은 그 자체가 헌법이 된다. 현행 헌법이 놓치고 있었기에 스스로가 내파될 수밖에 없었던 이 옹졸한 국가체제를 이제 우리의 헌법으로 대체하고자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에야 비로소 민주공화국은 현실에서 그 값을 하게 된다.

한상희 |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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