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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나는 내 생각의 가감 없는 표현이다. 나의 얼굴, 몸가짐, 내가 처한 환경과 운명은 내 생각 그대로의 표현이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도, 내 생각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 미래는 마치 조각가 앞에 놓여 있는 다듬어지지 않은 최초의 커다란 돌덩이다.

나는 형태가 없는 돌덩이와 같은 미래를 내가 원하는 아름다운 조각품으로 만들고 싶다. 나는 두 손에 정과 망치를 들고 마음속에 그려놓은 생각을 조각하기 위해, 쓸데없는 군더더기 돌들을 과감히 덜어내고 정교하게 쪼아내기 시작한다.

‘나의 미래’라는 조각품은 남들과 비교하거나 부러워하지 않을 때 빛이 날 것이다. 생각은 내 손에 쥐여 있는 정과 망치를 통해 어제까지 내가 알게 모르게 습득한 구태의연함을 쪼아버리는 작업이다.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여 내 생각을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도록 만들어내는 마술이다. 그러면, 내가 만들어낼 조각품의 청사진은 무엇인가? 내 손에 들려 있는 정을 부단히 움직이게 하는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

며칠 전 용산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을 무심코 들렀다. 그곳에서 한국조각의 걸작이라고 여겨지는 ‘반가사유상’을 보았다. ‘반가사유’는 내게 익숙하지만 그 의미가 아직도 아련해, 이 두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빙하시대 크로마뇽인들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 구석기시대의 동굴처럼 어두컴컴한 전시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 가운데 한국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과 일본국보 주구사 목조반가사유상이 마주 보며 10m 정도 떨어져 서로 무심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이 불상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 이 불상을 제작한 6세기 삼국시대 무명의 조각가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토록 묘한 조각 작품을 만들었을까? 거의 천오백년이 지난 오늘, 왜 이 불상 앞에서 숙연해지는 것인가?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금동반가사유상 앞에서 모든 것들을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불상 전면으로 가 그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불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하게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자신의 심연으로 한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불상 주위를 한 바퀴 돌았지만, 불상은 태초부터 이런 자세로 앉아 있었던 것처럼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신기하게 나의 부산한 움직임을 감지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않는 것 같기고 하고…. 기분이 묘했다.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왼쪽)과 83호 반가사유상._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불상은 그리 편해 보이지 않는 둥근 의자 위 방석에 앉아 있었다. 불상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올려 얹은 자세다. 그래서 ‘반가(半跏)’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명상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평평한 바닥에 결좌 자세로 허리를 90도로 꼿꼿이 세우고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지 않는가? 불상은 한쪽 다리만 다른 쪽 다리에 올리고 왼쪽 발은 족좌 위에 올렸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오른쪽 다리의 발바닥, 특히 엄지발가락 밑에 상당히 두툼하게 부풀어오른 부분이다. 붓다는 참선을 통해 해탈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탐닉한 것이 아니라 인간 군상들과 함께 먼지가 나고 고통이 가득한 세계 안에서 발이 붓도록 돌아다니신 것 아닐까!

불상의 왼손은 그런 발을 어루만지듯이 가볍게 올려놓은 오른발 복숭아뼈를 살포시 감싸고 있다. 오른쪽 팔꿈치를 무릎에 올려놓고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뺨에 살짝 대며 심오한 생각에 잠겨 ‘사유’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사유(思惟)라는 한자를 보면 심오한 의미를 훔쳐볼 수 있다. 생각 사(思)자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마음 심(心) 위에 있는 글자가 ‘밭 전(田)’이 아니라 한자의 뇌(腦) 글자의 오른쪽 아래 등장하는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오히려 생각의 대상은 뇌 속에 있는 이데아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매일 만나는 일상이라고 생각한다. 농부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의 터전인 ‘밭’인 것처럼, 생각의 대상도 ‘밭’과 같은 일상이 아닐까! 나를 더 나은 나로 변화시키는 현장은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이며 집이고, 내가 만나는 사람이며 책이다. 그 일상이 때로는 귀찮고 피하고 싶지만, 붓다의 왼손처럼 그 지치고 퉁퉁 부은 왼발을 어루만지는 것이 아닐까?

예수는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다”라고 단언한다. 천국은 죽은 다음에 가는 곳이 아니라 바로 여기, 매일매일 만나는 삶의 터전, 냄새나고 파리와 모기가 날리는 곳이다. 다만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그 안에 감춰진 보화를 발견하는 훈련이 바로 생각이 아닐까?

‘사유’란 단어의 ‘유(惟)’자도 신비하다. ‘유(惟)’의 오른편에 있는 한자는 ‘송골매’나 ‘최고’를 의미하는 추(추)자다. 생각한다는 것은 송골매의 눈으로 나를 보는 연습, 가장 높은 경지에서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관조하는 것이 아닌가. 서양 전통에서 ‘묵상’을 의미하는 단어인 ‘컨템플레이션(contemplation)’도 ‘자신의 모습을 독수리의 눈으로 찍어본다’는 의미다.

내가 응시해야 할 대상은 내가 처해 있는 현재 삶의 터전을 극락이라고, 지금 여기서 송골매의 눈으로 응시하는 것이 아닐까? 컴컴한 전시실을 나오려고 했다. 뒤에서 반가사유상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려보니, 그 불상이 나에게 미소(微笑)를 짓는 것이 아닌가.

내가 서 있는 이 장소와 시간이 나의 사유의 대상이며, 그것을 나를 위한 천국으로 만들려고 결심할 때, 신은 우리에게 미소를 선물한다.


배철현 ㅣ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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