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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5학년 아들이 학교에서 머리를 다친 채 집으로 왔다. 부모는 크게 놀랐다. 그런데 흥분한 엄마와는 다르게 아버지는 차분했다. 아들에게 사정을 묻자, 말다툼 끝에 같은 반 여학생에게 맞았다고 했다. 다툰 이유를 물으니 아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화를 냈다. 당장 때린 아이 집으로 가서 따지는 게 먼저라는 것이다. 그러자 남편은 자초지종부터 알아보고 해결하자며 아내를 설득했다. 아이 아버지가 가해 여학생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많이 놀라셨지요? 사실 저도 당황스럽고 속이 상합니다. 하지만 따님이 우리 애를 때린 분명한 이유가 있을 텐데, 제가 따님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안 될까요? 이 일로 아이들이 서로 상처 주고 원망하기보다 좋은 사이가 되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가해 여학생의 엄마는 안심하고, 딸과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양쪽 부모가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아들이 여학생의 아픈 단점을 건드리고 조롱했음이 밝혀졌다. 그 다음 아이 아버지는 어떻게 했을까.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공원을 거닐며 말했다.

“아빠·엄마는 어떤 상황에서든 너를 아끼고 사랑한다. 하지만 네가 잘못한 것까지 옳다고 편들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이 엄마와 아빠가 너를 사랑하는 방식이란다.”

아들은 울먹이며 그동안의 일을 털어놓았다. 아들이 잘못한 게 맞았다. 여학생의 감정을 건드려 분노를 유발시켰으니 결국 폭력의 원인은 아들이 제공한 셈이었다. 다행히 아들은 자신의 행동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다음날 아이는 부모와 함께 모인 자리에서 여학생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다. 그 뒤 두 아이와 부모는 친하게 지내며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어느 교사로부터 전해 들었다. 아이 아버지의 합리적인 교육법이 참으로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새삼 지혜와 사랑으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기도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즉 인간사회는 늘 갈등과 다툼이 존재한다. 한 제자가 부처님에게 인간은 왜 싸우느냐고 물었다. 종교인은 견해 차이로, 세간 사람은 재물과 권력 때문에 싸운다고 답했다. 여기에는 부처님이 제시한 갈등 해결 매뉴얼도 빠지지 않는다. <아함경>에는 정확한 사실 확인, 갈등 당사자들의 진술과 경청, 그리고 대화와 중재를 통한 해결법을 제시한다. 특히 대화하고 토론할 때 진실하고 부드럽게 말할 것을 강조한다.





부처님의 갈등 해결 매뉴얼과 비교해 보면 앞서 이야기한 아버지가 얼마나 지혜로운지 알 수 있다. 아이들은 어떻게 미움과 원망의 감정을 풀어낼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 피해 학생의 아버지는 결과에 흥분해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사실’을 규명했다. 그리고 사태 판단에서 그 어떤 선입견, 그러니까 ‘내 아이’라는 입장을 내려놓았다. 끝으로 서로가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했다. 어느 한쪽이 이기고 지는 결말이 아니라, 서로 화해와 성숙한 관계를 다지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합리적인 다툼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다양한 갈래와 층위의 갈등이 깊어가고 있다. 피로사회, 탈감정사회, 잉여사회, 팔꿈치사회 등 현대사회를 진단하는 부정적인 개념은 곧 우리 사회가 갈등과 다툼의 현장임을 시사한다. 혹자는 인간이 왜 서로 사랑하지 않고 다투느냐고 항변하지만, 이는 참 순진하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살아온 환경과 추구하는 가치, 사물을 보는 견해가 다른데 어찌 획일적인 ‘일치’가 가능하겠는가? 그러한 일치는 조화와 창의력 넘치는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지난 6월, ‘함께하는 경청’ 포럼이 창립했다. 창립선언문에는 ‘화쟁(和諍), 다툼을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롭게 다투면서 보다 차원이 다른, 차원이 높은 성숙과 상생을 이루자’는 취지가 담겨 있다. 평화롭게 다투기 위한 첫걸음은 바로 귀를 기울이는 경청이다. 몸을 낮게 기울여 서로의 소리를 들어야만 함께, 끝까지 갈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계층과 세대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노사정위원회가 성숙한 합의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다.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하여 수렴해야 할 정부가 한국사 국정교과서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모두가 내 편이 무조건 옳고 다른 편을 배제하고 혐오하고 탈락시키려는 어리석은 신념과 승자 독식이라는 욕망의 질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귀를 막고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다. ‘올바른’ 정치는 다양한 것을 보고 듣는 일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장미꽃은 들에 핀 작은 야생화를 깔보지 않는다. 가을 산중에 서늘하고 맑은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부는데 바람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 누구인가? 오직 열린 귀만 들으리라.


법인 스님 | 대흥사 일지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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