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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차 안에서 라디오를 틀었다가 광주지역 외국어 라디오방송 프로그램의 ‘전라도 사투리 배우기’ 코너를 듣게 됐다. 장난기에 그치는 예능 코너라기보다는 지역 문화를 이해한다는 목표의식이 드러나는, 유쾌하지만 진지한 코너였다. 진행자들은 모두 영어가 모국어인 듯했는데, 외국어수업과 음악수업의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이 기묘한 학습 풍경이 진지한 만큼 웃음을 자아냈다. 혼자서 미소를 지으며 방송을 듣다가 어느 순간 낯선 미학적 감흥에 빠져들었다. 그들이 애써 모방하는 전라도 사투리가 새삼 아름답게 들렸던 것이다.
사투리를 ‘촌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문화적으로 학습된 반응임이 분명하다. 처음부터 사투리인 언어는 없기 때문이다. 사투리는 근대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형성된 ‘중심-주변’의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호명된다. 하지만, 지구적으로 시야를 넓히면 그러한 정치적 구도는 흐려지거나 다른 양상으로 포착될 수 있다. 외국어 방송의 전라도 사투리가 아름답게 들린 것은 이러한 ‘지구화’의 문화적 효과와 연관될 것이다.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를 스스로 ‘촌스럽다’고 여기는, 사투리를 둘러싼 정서의 식민화 현상과 관련해 음악은 흥미로운 관찰거리다. 최근 개봉한 영화 <해어화>의 중심 소재를 이런 문제와 관련해 볼 수 있다. ‘조선 최후의 기생 이야기’를 표방하는 이 영화는 모더니티의 충격 속에서 한국 전통음악이 변방의 음악언어로, 곧 음악적 ‘사투리’로 전락하면서 20세기 내내 시달려온 문화적 열등감을 다루고 있다. 식민지 경성의 권번에서 한국 전통가곡을 전수받은 주인공 소율이 권번의 단짝 연희가 유행가수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극심한 열등감과 질투심에 빠져 파멸에 이른다는 줄거리다. 그런데 소율의 비뚤어진 인정 욕구는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와서 보상받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방송국 PD의 인정을 받은 늙은 소율은 후회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좋은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요?”
영화 <해어화>
소율의 가곡 창법에 연희의 유행가 창법과는 다른 미적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고, 영화 <해어화>는 결론 삼아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최근 문화적 지구화의 흐름 속에서 한국 전통음악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자신감이 배경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실제로 2003년에 판소리가, 2010년에 영화 속 소율이 부르는 전통가곡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됐다. 다른 한편 ‘월드뮤직’ 시장이 형성된 1990년대 이래로 한국의 젊은 전통음악인들의 참여가 가속화되면서 최근 들어 세계 음악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다. 이 점에서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 ‘소율’에서 미국 대중음악 장르 명칭인 ‘소울’이 연상되는 것도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삼성이 한국기업이라는 점이 더 이상 크게 의식되지 않듯이 지구화의 흐름은 기존의 근대적 국민국가시스템이 형성한 ‘중심-주변’의 정치적 구도를 해체, 재편하고 있다. ‘지구화’가 역설적으로 ‘지역화’를 추동함으로써 ‘지구지역화’가 논의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앞서의 외국어 라디오방송에서 전라도 사투리가 촌스럽지 않게 들렸던 것처럼 한국의 전통음악 언어 또한 이러한 ‘지구지역화’의 부쩍 넓어진 시야에서 재발견되고 있다. 그것은 젊은 문화수용자들의 편견 없는 태도와도 결합된 문화적·미학적 가능성이지만, 아직은 잠재성이나 착시효과에 머무는 것도 사실이다. “그땐 왜 몰랐을까요?”라는 성찰적 물음이 “외국인들이 저렇게 인정하는데”라는 탄식에 머물거나 국수주의적 자부심으로 회귀한다면 말이다. 그것은 사실상 영화 <해어화> 속 소율의 왜곡된 인정 욕구와 다르지 않다.
모든 지역 언어가 온전히 촌스러움의 멍에를 벗는 날, 비로소 전통음악을 비롯한 한국의 전통문화도 고유한 미학적 차원을 회복하게 되지 않을까? 그 ‘촌스러움’과 열등감 형성의 정치적 메커니즘이 사실상 동일하기 때문이다. 모든 언어는 제 나름의 표준어일 수 있다는 것이 지구화 시대의 미학적 평등을 위한 실천적 명제일 수 있다. 돌이켜보면 전라도 사투리는 판소리의 표준어가 아니던가.
최유준 | 전남대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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