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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은 장마철엔 굴비가 생각난다. 냄새 때문이다. 습기를 머금어 ‘꼬리꼬리한’ 그 냄새. 찬물에 만 밥 한 숟갈에 짭짤하고 ‘쿵큼한’ 굴비 살을 올려 꿀꺽 삼키면 우메보시나 명란을 올려 먹는 오차즈케에 비할쏘냐. 예전에 집집마다 굴비를 말릴 때는 장마철에 굴비를 신문지에 싸서 찬장 맨 위에 올려뒀다고 한다. 습기와의 전쟁에서 나온 게 보리굴비다. 통보리가 든 항아리에 말린 굴비를 박아놓으면 보리가 습기를 다 빨아들여 굴비가 돌덩이처럼 딱딱해진다. 홍두깨로 두드려 쪄낸 보리굴비는 쭉쭉 찢어먹는 게 제맛인데 내장의 기름기가 밴 뱃살 부위는 천상의 맛을 낸다. 그렇긴 해도 굴비엔 습기가 필요하다. 해가 내리쬐는 낮엔 마르고 습도가 높은 밤엔 내부의 수분이 역으로 확산되는 일이 반복돼 발효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굴비 얘기 하니까 참조기 수난의 역사가 떠오른다. 요즘 보리굴비 정식을 하는 집에서 내놓는 것은 대체로 중국산 ‘부세’로 만든 것이다. 우리는 부세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중국에선 50센티미터 넘게 자라는 이 물고기를 대황어라며 더 윗길로 친다. 최근 양식에 성공해 값이 싸진 덕분에 국내 식탁에도 오른다. 조기도 종류가 다양하다. 백조기는 여름 서남해안에서 주로 잡히는데 참조기보다 맛이 떨어진다고 하나 소금 간 해서 꾸덕꾸덕 말린 백조기는 조상님 제상에 올리고 싶을 정도로 맛나다. 다들 참조기 노래를 부르지만, 맛있어서 참인지 많이 잡혀서 참이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요즘은 씨가 말라 씨알 굵은 최상급 참조기는 마리당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금이 돼버렸다.
봄이 되면 추자도, 흑산도를 거쳐 올라온 참조기 떼가 서해안을 가득 덮어 포구마다 조기가 넘쳐날 때도 있었다. 흑산도에서는 3월에 만선을 하고, 법성포 앞 칠산바다에선 4월에 만선을 하며, 휴전선 부근의 연평도에서는 5월에 만선을 했다. 연평도에선 동네 강아지도 조기 한 마리씩을 입에 물고 다녔다. 조업이 서해에서 이뤄진다고 근방의 배들만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부산에서도 오고 속초에서도 왔다. 다들 만선을 했다. 이들을 먹이고 재우기 위해 파시(波市)가 열렸고 젓가락 장단이 울려 퍼졌다. 조기 떼를 쫓아 장을 옮기던 파시꾼들은 북상한 참조기 떼가 동지나해로 남하하기 시작하면 한 해 장사를 결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조기는 상거래의 첨병이기도 했다. 칠산바다에서 잡힌 조기는 강경포구로 실려와 영산강, 금강 물길을 따라 충청 내륙으로 옮겨졌으며 ‘소금길’로도 불린 보은길로 빠져나와 조령을 넘어 영남으로 내려갔다. 연평도에서 잡은 참조기는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마포에 부려졌고, 일부는 소금배에 실려 북한강을 따라 강원 내륙으로 가서 약초, 땔감 등과 물물교환했다. 어염(漁鹽)의 길이고 조기의 길이다.
심훈의 <상록수>엔 주인공 남녀가 독립문 근처의 ‘명물’로 떠오른 ‘악박골 약물’을 마시러 가는 장면이 나온다. 마시면 병을 잘 고친다고 해서 사람이 몰리자 천막을 치고 약물다방이 생긴 것이다. 물을 두 바가지 정도 마시려면 찝찔한 게 필요해 굴비를 억지로 안겼다고 한다. 젊디젊은 남녀가 한 바가지씩 하고 비쩍 마른 굴비를 뜯는 모습을 떠올리니 참으로 아름답다.
참조기는 다 자라면 35센티미터까지 크지만 지금 목포와 제주 사이에서 잡히는 것들은 고작 15센티미터 안팎이다. 사실 잡으면 안되는 다 자라지 않은 조기다. 그래도 조업 허가가 나는 건 왜일까. 종의 보존을 위해 성어가 채 되기 전 산란하는 방식으로 조기가 인간의 포획에 대응했는데, 알을 낳으면 다 자란 것 아니냐는 합리화의 구실을 제공한 것일까. 지금도 조기는 싹쓸이 조업에 당할 수 없어 멸종의 길로 치닫고 있다.
동해를 대표하는 명태, 서해를 대표하는 조기는 이제 우리 바다에서 아웃됐다. 기후 변화 탓도 있지만, 치어를 잡는 게 문제다. 바다 생태계 복원은 이제 시급히 풀어야 할 숙제다. 한겨울 남해에서 잡히는 대구는 다행히 생태계 복원에 성공했다. 한때 남해에서 씨가 말랐던 대구는 양식으로 키운 치어를 지속적으로 방류했더니 지금은 해마다 고향을 찾아와 대구 풍어를 이룬다고 한다. 명태는 양식이 어려워 연구에 연구만 거듭할 뿐 생태계 복원은 요원하다. 참조기 쪽도 치어 양식이 녹록지 않다가 최근 심해수 양식기술로 어느 정도 성공해 올해엔 법성포와 연평도에서 도합 100만마리 가까이 바다에 방류했다고 한다. 100마리를 방류하면 15마리 정도가 돌아온다는데 꽤 높은 비율이라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앞으로 몇 년이 관건인 듯하다. 서해에 조기 벨트가 다시 그려질 수 있을까. 그래서 팔뚝만 한 참조기 굴비를 먹태 대신 뜯을 수 있는 날이 올까.
강성민 |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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