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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9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쉬면서 10월을 맞는 마음은 여유롭다기보다는 시무룩했다. 연말의 들뜨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곧 찾아들 테고 가을의 독자들이 낙엽처럼 흩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인디언 부족마다 10월을 부르는 이름이 달랐다는데, 크리크족은 ‘큰 밤 따는 달’, 카이오와족은 ‘추워서 견딜 수 없는 달’이라고 불렀다. ‘어린 밤 따는 달’이 가고 큰 밤을 딸 희망에 찬 부족과 ‘나뭇잎 떨어지기 시작하는 달’을 보낸 후 추위를 걱정하는 부족의 자연관이 이렇게 다르다. 살아가는 태도도 달랐을까.

연휴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 중국 우전 출장을 다녀왔다. 인문서를 출간하는 동아시아 5개국 6개 지역이 모인 콘퍼런스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전 세계를 시장으로 삼고 도서정가제가 없어 거대한 글로벌출판 트렌드를 휩쓸고 있는 영미권 출판인보다 한자문화권의 전통을 공유하고 도서정가제라는 유통 방식을 유지하는 동아시아의 출판인들 이야기에는 아무래도 공감하기 쉬웠다.

20여명의 출판인이 발표하는 내용 모두 생생한 체험담이었는데, 공통적으로 고민하는 지점이 세 가지로 선명했다.

출판사가 지식 콘텐츠의 디지털 플랫폼을 만들 것인가, 거대 기업의 플랫폼에 올라탈 것인가. 그리고 디지털의 무료 정보와 지식에 익숙한 독자에게 유료 지식은 어떤 차별점으로 다가가고 전달할 것인가. 독자들은 디지털 지식의 내용뿐만 아니라 서비스의 접근 방식에 따라 값을 지불할 용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 나머지 한 가지는 전통 인문서, 논픽션 장르의 새로운 가치 부여와 혁신이었다. 창작 원고는 말할 것도 없고 인문 저자가 출판사의 개입 없이 자가 출판하는 일이 쉬워질 터인데, 출판인은 가치 있는 원고를 찾아 출판해야 하는 과업이 더 막중해졌으니, 장르에 대한 자각을 유연하게, 또는 새삼 공고하게 해야 할 판이었다. 종이책만이 아닌 전자 콘텐츠와 커뮤니케이션을 포함한 출판에 대해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출판인의 고민이 이번 콘퍼런스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출장 단상을 제대로 정리하고 기록할 새도 없이 도쿄의 서점 몇 군데를 짧은 일정으로 다녀왔다. 도쿄에 머무는 동안 노벨 문학상 발표가 있었다. 일본 나가사키 출신의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수상으로 서점 분위기가 어떠할까 기대하며 발표 다음날 찾아갔으나 막상 이시구로의 일본 번역본은 발표 전 품절 상태였다. 한 권을 구입해 여행 기념으로 삼으려 했으나 아쉬웠다.

도쿄의 중심부에 올봄에 개장한 화려하고 우아한 긴자식스의 쓰타야부터 헌책방 거리인 진보초의 고서점까지, 독자와 책 사이의 맥락을 헤아리며 서성거렸다. 카페나 공원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다른 시각으로 보였다. 이들 중에는 모바일로 출판 콘텐츠를 즐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종이책을 펴든 독자만을 독서 풍경으로 붙잡을 수 없다. 다만 정보나 토막 난 콘텐츠를 읽는 일이 흔한 세태에서 출판사가 발행하는 체제를 갖춘 책을 읽는 독자는 어떻게 탄생하는 것일까 다시 생각해보았다.

낙엽도 길을 만든다고 했다. “사람들 발길이 낸/ 길을 덮은 낙엽이여/ 의도한 듯이/ 길들을 지운 낙엽이여/ 길을 잘 보여주는구나/ 마침내 네가 길이로구나”. 정현종 시인의 시 ‘낙엽’ 전문이다. 기존의 길을 지우며 의도한 듯이 새로운 길을 보여주는 낙엽이라니.

‘소셜리딩’이란 용어가 생겨날 정도로 책에 갇혀 있던 콘텐츠를 풀어내고 함께 읽고 체험하고 공유하는 독서 모임을 떠올리면 이것은 또 새로운 길이 아닌가 희망 섞인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나 홀로 묵독하는 독자와 강연과 낭독회에 참석하거나 팟캐스트에 적극 참여하여 즐기는 독자가 겹치면서 새로운 길이 생겨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연휴가 끝나간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휴식이었다. 적어도 잔걱정만 하다가 일할 의욕이 꺾인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10월을 “낙엽도 길을 만드는 달”이라고 불러볼까, 이런 싱거운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역시 출판 일이 내 삶을 추동하는 것이 맞나 보다.

<정은숙 |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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