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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한글 전용은 근대 이후 우리 역사의 큰 흐름이다. 이러한 흐름의 역사적 의미는 적지 않다. 빠른 속도로 독서 공중을 만들어냈고 어려운 글자로 정보를 독점하던 계급의 인습을 몰아냈다. 그런데도 1945년 이후 한글로만 쓰기를 둘러싸고 시비가 끊어진 적이 없었다. 헌법재판소에 한글 전용이 위헌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지난해에 겨우 합헌이라는 결정이 났다. 왜 논란은 사라지지 않고 길게 이어진 것일까.
첫째, 우리말과 글에 대한 유교식 편견을 들 수 있다. 훌륭한 알파벳을 갖고도 500년이나 그 가능성을 깨닫지 못한 것은 모화사상의 엄청난 무게 때문이었다. 중국과 다른 글자를 쓰면 오랑캐가 된다는 생각에 따라 오랑캐를 면하려고 끝없이 우리 고유문자를 버리려고 애썼다. 모범적인 사대조공국인 조선에서 이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유교를 받치던 한 기둥인 과거제도는 형식에서는 엄격한 중국식 한문 쓰기를 강요하여 극단적 귀족주의를 낳았고, 내용에서는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를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중국 고전의 내용이 고대 중국의 역사와 문학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상사에서 볼 때 한글만 쓰기는 단순히 문자 생활을 편리하고 대중적으로 한다는 차원을 훌쩍 넘어가는 큰 뜻을 갖는다. 한글에서 자주적 학문과 사상을 위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둘째, 경성제대의 ‘과학적’ 국어학 때문이기도 하다. 한글을 일본의 가나와 같은 것으로 보는 한자 혼용론이 조직적으로 한글 전용에 맞섰다. 그러나 한글과 가나는 성격이 크게 다르며 한자와 한문도 조선과 일본에서 그 성격이 서로 판이하다. 한글로만 쓰기는 한글로만 적었을 때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낡은 어휘를 정리하고 쉬운 말을 쓰자는 것이다. ‘탄핵을 인용하다’는 낯선 말보다 ‘탄핵을 용인(승인)하다’로 쓰고, ‘화폐’보다는 ‘돈’을, ‘존재’보다는 ‘있음’을 쓰자는 게 한글 존중의 근본 뜻이었다. 일찍이 이희승은 언어의 ‘자연성’을 내세워 ‘명사’를 ‘이름씨’로 바꾸는 주시경 학파의 새말 만들기를 인위적이라 비판하였다. 그러나 ‘명사’나 ‘이름씨’나 모두 만든 말이다. 외국인이 만든 ‘명사’는 되고 우리가 만든 ‘이름씨’는 안된다는 말은 아무 근거도 없었다. 이는 사실상 우리말의 손발을 묶는 결과를 불러왔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새말을 자꾸 짓지 않으면 우리말이 변화하는 현실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다. ‘비행기’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날틀’이 못 쓰일 까닭은 없다. 이희승의 주장은 역사 비교 언어학에서 자연과학을 이상적으로 여기던 생각에 기댄 것이었다. 그러나 언어의 자연성을 어휘에까지 확장한다면 역사 비교 언어학자들도 놀랄 것이다. 경성제대의 ‘과학적’ 국어학은 해방 뒤에 서울대를 매개로 엄청난 세력을 얻었다. 한글로만 쓰자는 국어학자는 ‘주류’에서 비켜나 있었다.
셋째, 한자도 우리 글자라는 착각이 널리 번져 있다. 한글 사랑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지어낸 말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아니면 유럽에서 라틴 알파벳이 쉽게 국경을 넘어 쓰이 듯이 한자도 그러리라고 여기는 것 같다. 알파벳의 낱자는 의미(기의) 없는 형식적 기표일 뿐이기 때문에 쉽게 국경을 넘어간다. 한자가 뜻글자인 한 뜻(기의)은 기표(음, 형)와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일본처럼 한자를 뜻으로 읽을 때에는 중국식 음성 기표가 잊히면서 토착화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전통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한자는 중국 글자일 뿐이다. ‘大橋’라고 써도 일본처럼 ‘큰 다리’ 식으로 읽지 않는 것이다. 들어온 지 1000년을 넘었다는 사실이 우리 것으로 되었음을 뜻하지 않는다. 물론 한자가 외국 글자라는 사실이 배척받을 논리적 근거는 되지 않는다. 한자도 우리 것이라고 하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일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나 이는 분명 사실이 아니다.
한글 전용은 우리 지성사의 큰 성취이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낡은 한자식 어휘는 물러가지 않고 버티고 있고 영어는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한글로만 적는다고 반길 수 있을까. 한글로만 쓰기라는 흐름은 단순히 대중의 실용적인 선택에 기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글은 우리가 세울 자주적인 겨레 문화의 집이자 민주주의적 소통의 매개체다. 역사적 타성으로 말미암아 많은 세월을 필요없는 시비에 휘말려 그냥 흘려보내고 말았다.
<김영환 | 한글철학연구소장·부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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