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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한 야산의 풀밭에 산구절초가 무리지어 꽃을 피우고 있다.
가을이 막 깊어지기 시작하는 즈음, 하루해가 저물어 가고 있는 국립수목원에서는 <수목원의 저녁노을 콘서트>라는 제목의 작은 음악회가 있었다. 수목원 주변 마을에는 자연이 좋아 찾아드신 분들이 많은데 특히 예술가들이 100여분이 되신다고 한다. 그분들이 ‘수목원 가는 길’이라는 문화마당을 만들어 매년 이즈음 예술제를 한다. 행사가 열리는 4일간 말 그대로 국립수목원으로 가는 길 인근의 이곳저곳에서 전시회, 다양한 형태의 공연, 그리고 작가들의 오픈 스튜디오 등등 참으로 정답고 행복한 행사들이 벌어진다. 지자체나 특정한 기관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의 문화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매년 깊이를 더해가고 참여를 늘려가며 7년째 이어온다는 것은 어찌 보면 기적처럼 의미 있고 아름답다.
국립수목원에서의 작은 음악회는 그 행사 가운데 하나였는데 좀 특별했다. 우리나라 가곡의 대표적인 원로 작곡가 세 분과 젊은 작곡가 한 분을 모시고 여러 성악가들이 그분들의 노래를 부르는 방식이었다. 최영섭 선생님의 ‘그리운 금강산’ ‘그리운 내님이여’, 신귀복 선생님의 ‘얼굴’ ‘백두산’, 이수인 선생님의 ‘고향의 노래’ ‘국화 옆에서’ 등등 한 곡 한 곡 듣고 있자니 우리의 어린 시절은 그분들의 노래 속에 있었던 듯, 수없이 부르고 듣던 노래들이었고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지난 시간들로 돌아간 듯 추억을 꺼내오며 감동으로 살아났다.
특히 마지막에 이수인 선생님의 지휘로 열명 가까운 성악가와 청중들이 함께 ‘내 맘의 강물’을 불렀는데, 홀로 서 계시기조차 어려워 의자에 앉으신 채 지휘를 하시는 노 작곡가의 손끝 움직임 속엔 긴 세월과 하고 싶었던 이야기와 아직 남은 마음속 정열이 고스란히 묻어나 가슴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그 여운의 끝에서 우리의 지난 시간들을 가득 채웠던, 우리의 노래들을 만들어 주신 그분들이 만들어 주신 이 아름다운 순간을 이렇게 조촐하게 마련된 자리에서 뵙게 된 것이 송구했다. 지난달 세종문화회관에서 크게 열렸던 루치아노 파바로티 10주년 추모음악회를 다녀 온 터라, 그 가책이 더했던 것 같다.
이 행사를 총괄하신 윤희철 교수님은 국립수목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씀해주신다. 자리를 내어 드린 일 이외에 크게 기여한 바가 없어 무척 부끄러웠지만, 수백년 동안을 지켜온 광릉숲의 나무와 풀들이 있었기에 장수하늘소를 비롯한 온갖 생물들이 서식하고, 그런 자연을 보전하고 연구하는 국립수목원이 생겨나고, 그 절대적인 자연을 동경하며 사람들이 모여 들어 마을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고, 자연 속에서 영감을 얻은 예술가들의 창작이 이루어지고 이것은 다시 사람에게 평화와 위로로 전달되는 선순환의 고리의 시작은 결국 나무들 덕분인 것은 맞다.
많은 이들이 수목원이나 식물원은 식물들을 전시하는 곳, 쉬거나 놀러가는 곳으로 여긴다. 만일 그 기능이 전부라면 좋은 공원이나 휴양림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수목원이나 식물원의 진짜 기능은 자연과 사람의 중간에서 다양한 식물들을 모아 보전하고 연구하는 것이 첫째 임무이다. “왜 보전하느냐!” 얼핏 자연을 위해서라고 생각되지만 그 속에는 미래까지 지속가능한 이용을 위한, 사라지기 전에 현재의 보전, 즉 인간을 위한 관점이 담겨 있다. 이렇게 모인 식물을 연구하고, 가능하면 아름답고 의미 있게 심고 가꾸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저절로 자연을 소중하게 만드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된다. 때론 수목원에 보전된 식물들이 훼손된 자생지를 복원하는 데 쓰인다. 모아진 식물들은 신약이나 식용 혹은 관상용 식물을 개발하는 연구 소재로 이용되기도 한다.
이제는 수목원이나 식물원은 기능을 더 보태어 가장 이상적인 자연문화 나눔의 장으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 음악회 말고도 몇 해 전, 노란 은행나무 아래서 열렸던 김훈 선생님과 독자들의 만남은 가을 잔상으로 살아 있다. 며칠 후 서울 문학의 집 문인들이 숲산책을 나오신다니 그분들이 풀어낼 숲의 소리가 벌써 기대된다. 뉴욕이나 런던의 식물원에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가 1년에 한 번 편한 모습으로 대중과 만나는 음악회가 열려 많은 이들이 이를 동경하기도 하는데, 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는 광릉숲 국립수목원은 숲속의 동물들에게 방해될 것이 염려되지만 도시형 수목원이나 식물원에서는 가능하지 않을까!
여러 방식으로 자연과 공유하며 쌓인 추억들은 ‘위로’ ‘영감’ ‘사유’ 등 여러 모습으로 살아나 우리가 살아가는 평생의 친구가 될 것이다. 한가위에 만난 우리 고향의 풍경, 자연, 사람 그 모든 것들도 차곡차곡 쌓아준 따뜻한 추억들처럼.
고향의 산야에 피고 있을 풍성하고 향기로운 산구절초 모습으로 추석선물을 전하고자 한다.
<이유미 | 국립수목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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