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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을 앞두고, 학생들에게 “국어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예상대로 어려웠다. 수능이 끝난 후 학생 하나가 물었다. “선생님, 왜 그런 문제를 낸 겁니까?” 내 답은 무거웠다. “솔직히 문과 학생들을 위한 문제는 아니야. 의대 정시를 위한 거지. 서울대, 연세대, 성균관대 등등 의대 사이에 줄 세우기를 위한 문제가 필요했던 거야. 문과에서도 서울대 선발에 필요한 문제는 있어야 했을 테고.”

영어가 절대평가로 전환된 후 국어는 풍선효과를 맞았다. 우리말을 잘 이해하는 능력이 존중받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이슈가 된 ‘31’번 문제는 국어교육의 이상과는 거리가 있다. 독해와 화법 등 언어 능력과 한국어 문법의 이해, 문학 작품 감상 능력 등이 국어과에서 기대하는 영역이다. 이번 수능에서 다른 문제들은 쉽게 출제되었다. 40대 이상 기성세대들이 접했던 문제들과 비교하면 지금 국어문제는 여러 면에서 실용적이고 과학적이다. 우선 읽기·말하기·듣기·쓰기 전 영역을 고르게 평가하고 드라마 등 생활에서 쉽게 접하는 제시문들의 비중도 높고, 작문 역시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16페이지나 되긴 하지만 주어진 시간 내 읽으며 풀어나가는 데 큰 부담은 없다. 채무 이행에 관한 문제가 나온 16번에서 20번 역시 쉬운 문제는 아니었겠지만 상대평가에서 필수적인 문제였다. 다만 수능 전체 변별력, 특히 정시 지원에서 표준점수 차이를 내야 하는 의무를 껴안은 국어에는 난도 최상의 문제가 있어야 했다. 난이도 부담이 덜했다면 ‘31’번 문제는 출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15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교육부에서 성기선 교육과정평가원장(왼쪽)과 이강래 출제위원장이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경향을 발표하는 도중 기자들의 국어영역 오기 질문이 이어지자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영어만 절대평가가 되고 수학이 사교육비 부담 우려로 난도를 높이기 어려운 상황에서 변별력 부담은 국어에 쏠리고, 그 부작용은 갈수록 두드러지고 있다. 최근 교육부가 요구한 정시 확대는 직접적으로 난도를 높이는 외압으로 작용해 국어 재앙은 당분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로 인해 최근 대치동 학원가에서 제일 두드러진 현상이 ‘국어 일타 쏠림’이었다. 절대평가 실시로 기대할 수 있는 이익은 거의 없고, 부작용만 다른 과목으로 옮겨간 셈이다. 만약 정시 확대가 현실화된다면 국어로 인한 난이도 차별 압박은 심화되어 ‘31’번 같은 문제가 2~3개 추가될 가능성도 우려된다.

이런 점에서 현 수능에서 시급히 논의할 문제가 영어 절대평가이다. 정시가 확대되면 국어의 표준점수는 더욱 세분화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국어의 난도 상승으로 이어진다. 국어 난이도 딜레마는 현행 수능 제도의 모순을 그대로 안고 있다. 영어 절대평가나 난도 낮은 수능 출제라는 상위 원칙은 수시 확대, 교과 중심 선발 확대라는 학생 선발 제도와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정시 확대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수능 구조 역시 위기를 맞은 것이다. 지난 상반기 교육부는 나름 진통 끝에 대입 제도에 관한 결론을 냈다. 그런데 그 결론이란 게 불분명한 데다, 추론의 책임자마저 바뀐 상태에서 대입 제도의 방향은 혼란스럽고, 출제진 역시 당장 올해 정시 지원에 어려움이 없어야 한다는 미봉적인 압력에 이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만큼 지난 수능 국어 ‘31’번은 혼란스러운 대입 제도의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문제는 학생들의 정신적 피해다. 수능 당일 국어 ‘31’번으로 인해 받은 쇼크를 악착같이 견딘 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국어로 인해 ‘멘붕’이 와 다른 과목까지 지장을 받은 학생들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년에는 결코 겪고 싶지 않은 장면이다.

<정주현 | 논술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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