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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님이 생전에 이런 고백을 하셨다. “애가 다섯이나 되는데 책 읽을 시간이 있겠어요? 게다가 한옥집의 구조라는 게 눈만 돌리면 일거리죠. 그래도 꾸준히 책을 샀고 꾸준히 읽었어요. 옛날 피란 때는 짐보따리를 놓고 올라가 천장에 도배된 신문까지 다 읽었어요.” 왜 그리 절박하게 읽으셨을까. ‘자존심’의 문제였다고, 바쁜 주부 생활인이지만 스스로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관심을 갖고 생각하며 사는 삶을 지향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바쁘고 시간이 없지만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독서는 꾸준히 했다는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요즘 사람들은 마음이 급하다. 좁은 도로에서 운전자들이 서로 양보하지 않고 상대방 차를 먼저 뒤로 빼라고 고함을 치면, 그 곁을 걷는 사람도 마음이 졸아들어 얼른 벗어나고 싶다. 아무리 급해도 앞차가 막고 있는 한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이건 어떤 차가 양보해야 하는지 교통법에 규정된 이야기의 차원이 아니다. 좁은 도로에서는 충분히 이런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7월1일부터 시작한 ‘도서 구입 소득공제’에 대한 생각도 비슷하다.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니 내가 구입할 책 서지 사항 사이에 ‘도서 구입 소득공제’ 안내가 눈에 띈다. 클릭하니 세액 절감 예상 금액을 조회하면 적립금 1000원도 준다고. 냉큼 구입한 책 총액을 적어보았더니 애걔걔, 매우 적다. 나는 근로 소득자가 아니므로 연말정산의 대상자가 못 되고 실제로 소득공제를 받을 수도 없다. 그래도 궁금해서 조회를 해본 것이다.

오랫동안 출판계에서는 도서 구입 세제혜택을 주장했다. ‘국민 독서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구입한 책에 세제혜택을 준다면 실제 책 구입이 늘어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문화 지출이 확대될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이번에 세제혜택은 아니지만 ‘도서 구입 소득공제’를 반겼다. 그런데 여러 문제가 노출되었다. 작게는 일반 카드 결제가 아닌 전자화폐는 구입액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든가 잡지나 문구는 책과 따로 결제를 해야 한다든가, 크게는 소득공제가 꽤 의미 있는 세액 감면 효과를 내려면 책 구입비가 상당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무척 반겼던 일인데, 여기저기에서 볼멘 목소리가 나온다.

방향이 틀렸다고 볼 수 없는 일이다. 시작이 미약하더라도 출판계가 원했던 일이다. 나는 조급하게 제도의 한계를 지적하고 싶지 않다. 이게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가.

‘도서 구입 소득공제’ 시행 보름 만에 도서 판매가 늘었다는 통계 수치도 나왔다. 시행 일주일간 인터넷 서점 예스24의 도서 매출액 집계 결과,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5% 늘었다는 것이다. 아, 나는 또 이 뉴스에서도 어떤 조급증을 보았다. 분명 원하던 결과의 뉴스였는데도, 시행 일주일의 데이터로 낙관적인 발표를 하는가 싶어서다. 문화와 관련된 행사를 분석할 때 경계해야 할 태도가 숫자 통계에 빠지는 것이라고 평소에 생각해왔다. 문화는 경제적 산출의 즉각적 반응을 기대할 수 없는 속성을 가졌다. 사회 공동체에 서서히 스미고 견고하게 자리 잡는다. 처음에 젖은 줄 몰랐다가 어느 순간 온몸이 온통 물에 빠진 모양이 되는 보슬비와 같은 것이 아닐까.

도서 구입이 소득공제로 시작해서 세액공제로, 그사이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도서 구입 습관이 들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 사회가 조급하게 문화의 경제적 성과를 다투기보다 성과를 내는 과정에서 성찰하고 즐기게 되면, 그 자체로 문화적인 삶이라고 나는 믿는다.

책 안 읽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이유는 한결같다. 시간이 없다고. 그리고 경제적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다고. 게다가 어디에서든 실시간 정보가 넘치고 있으니 눈과 귀가 한시도 쉬지 않는다. 다시 전쟁 피란 중에도 책을 찾아 읽었다는 박 작가님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자신에게 휘몰아치는 바쁜 일거리 사이에서 고요하게 자신을 찾기 위해 책은 필요했던 것이다. 책을 사서 보는 습관, 자신에게 선물하는 독서 시간, ‘도서 구입 소득공제’는 조급한 일상생활을 해나갈 수밖에 없는 근로 소득자가 그런 습관과 시간을 찾는 데 거드는 제도다.

좁은 도로에서 마주친 차 한 대가 뒤로 조금씩 물러나면, 앞차가 빠져나갈 수 있게 한다면 자신의 차도 금세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 바쁜 생활 속에서 잠시 뒷걸음칠 수 있다면 나아가고 싶은 방향으로 곧 갈 수 있다.

사실 소득공제를 받기 위해 도서를 구입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서점과 나’의 관계를 환기하거나 도서 구입의 마음을 불러일으킨다면, 제도적으로 혜택을 준다고까지 한다면 이것은 아름다운 방향이다. 그렇다면 끝까지 그 방향 그대로 가보자.

<정은숙 |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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