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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산책자]부연마을에 가서

opinionX 2019. 4. 29. 11:36

지난주에 오대산 북쪽 자락의 한 오지마을을 다녀왔는데 이름이 부연동이라 했다. 솥 부(釜)에 못 연(淵)자를 쓴 마을이다. 바야흐로 산천초목이 새의 혀 같은 이파리를 밀어내는 계절. 1000m 고봉을 사방으로 끼고 실낱같이 이어진 도로를 따라 부연마을 가는 길은 수묵담채화가 수묵채색화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산색이 어찌나 맑고 아름다운지 신세계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때 인솔자가 “여긴 전쟁 난 줄도 모르고 지나갔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만큼 깊고 외부와 단절된 마을이다. 과연 얼마나 깊을까. 가도 가도 길은 계속됐지만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 무렵 눈앞이 확 트이면서 넓은 분지가 나타났는데 바로 부연마을이었다.

가옥의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펜션 같은 현대식 건물도 드문드문 보였고 그 외엔 온통 두릅나무 밭이었다. 마을 옆으론 계곡이 흘렀는데 바로 남대천 상류다. 연어도 아닌 우리는 계곡을 거슬러 오르며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길을 찾아 물을 건너다니면서 서너 시간 꽃구경, 나무 구경을 했다. 마을 입구부터 지천으로 피어난 산괴불주머니를 시작으로 피나물, 바람꽃, 제비꽃 등 온갖 꽃이 외지인을 맞아주었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라 그런지 식생이 호화로웠고 크게 자란 낙엽송이 빽빽하게 우거져서 봄인데도 밀림의 느낌을 주었다. 실컷 걷고 도시락을 까먹고 계곡물에 발 담그고 참방일 때까지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갑자기 시끄럽더니 눈앞에 큰 폭포가 나타났다. 그 밑으로 깊은 소가 있었다. 아, 저것이 부연(釜淵)이구나. 관광명소가 되고도 남을 풍채의 폭포를 독차지하고 보고 있으려니 선택받은 느낌에 행복해졌다. 내려오는 길에 화전민 집터를 지나갔다. 이런 깊은 곳에서도 예전엔 사람이 밭을 갈아 먹고살았구나.

다시 차를 타고 양양 하조대로 나와 저녁을 먹을 때도 감흥은 가라앉지 않았다. 저 산이 내게 무언가를 말해주고 싶다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니 1984년에 김선풍 중앙대 교수 연구팀이 부연동 민속을 조사한 자료가 있었다. 두 차례에 걸쳐서 마을 주민에게 풍습, 민요, 민담 등을 채록한 것인데 나같이 아무것도 모른 채 다녀온 치에겐 천지개벽의 놀라운 정보가 가득했다. 

우선 “전쟁도 모르고 지나갔다”는 건 사실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들이 마을에 들어와 집이란 집은 다 불태워 너와집, 굴피집 등속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부연동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건 500년 전부터였다. 워낙 오지인 데다 먹고살기 힘든 환경이니 집성촌은 못 이루고 대처에서 쫓겨난 이들이 숨어 들어오듯 해 정착하면서 각성바지 마을을 이루었다. 쌀과 감자농사를 많이 지었고 자생하는 당귀를 캐다가 팔기도 했다. 주문진으로 장을 다녔고, 민속 명절 때는 농악대가 원정을 와주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호랑이를 잡아 강릉 원님에게 바친 일도 있었다. 마을의 빈집에 호랑이가 들어왔는데 마을에서 창질을 가장 잘하는 이가 부엌에 가서 소리를 지르고, 들보로 나오는 걸 찔러 잡았다고 한다. 혹시나 벌을 받을까 조마조마하며 갖다 바쳤다. 

가장 궁금했던 건 화전민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집터만 남겨놓고 그들은 전부 어디로 사라졌을까. 마을 사람의 기억엔 어떤 시기에 몽땅 철거가 됐다고 했는데 진술이 분명치 않아 다른 자료를 뒤져보니 1968년에 화전정리법이 공포되어 정부가 강원도 산간 화전민을 다른 지방에 정착시켰다고 한다. 그러니 아마 그 언저리쯤부터 산이 텅 비기 시작한 것이다. 봄이면 산에 불을 질러 밭을 일구고 옥수수 알갱이를 곤드레와 섞어 개밥처럼 끓여 먹는 게 이들의 주식이었다. 다만, 그날 산에서 본 군데군데 쌓인 돌무더기는 화전민의 흔적이 아니었다. 심마니들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낸 흔적이었다. 오대산의 산신은 여신이다.

그 외 부연마을에 접어들 때 봤던 장군송은 금강송 군락지로 유명한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인데 기념수로 관리되기 전엔 단오만 되면 그 나무에 그네를 걸어 탔다고 한다. 집집마다 양봉을 했는데 계곡 전체가 꽃밭이니 이는 당연한 일일 테고 유독 산괴불주머니가 마을을 둘러싸고 지천으로 핀 것도 번식을 잘하는 이 꽃이 양봉에 이용된 흔적일 것이다.

1984년 당시 김선풍 교수팀에 구술을 해준 마을의 백남혁 어른은 당시 50세였는데 20여년 뒤인 2005년의 언론 기사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 70세 노인이 된 그는 자식을 다 키워 내보내고 부인과 단둘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당시 기사에서 장작을 패며 겨울을 준비하던 백 노인은 지금, 살아계신 것일까. 한 번도 뵙지 못한 그분의 안부가 궁금하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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