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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산책자]사산되는 책들

opinionX 2017. 3. 20. 11:04

얼마 전 우리 출판사 편집자가 “ㅠㅠ” 표시와 함께 내게 메일 한 통을 전달했다. 우리 책을 번역 중인 번역자였다. 원래 메일을 길게 쓰시는 분인데 이날은 유난히 길었다. 스크롤 압박을 우려해서인지 메일은 결론부터 말하고 있었다. 번역을 못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책은 아랍의 철학사를 다룬 프랑스 도서였다. 2년쯤 전에 이 책의 존재를 알아 평소 교류가 있던 번역자께 검토 의뢰를 드렸다. 매우 어렵긴 하나 아랍 철학을 근본부터 이해할 수 있는 요긴한 책이었다. 240쪽 정도로 얇았다. 감수를 받으면 큰 무리는 없겠구나 싶었다. 검토하신 번역자께 번역을 부탁드렸으나 고사했고, 재차 부탁해서 어렵게 번역 작업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2년 뒤 “십수 년 경력에서 출판사가 아닌 제 스스로의 결단으로 번역을 포기하는 첫 책”이라는 고통이 토로되었다.

포기의 논거들은 구체적이고 명확했다. 우리말로 표현하기 애매모호한 개념이 많고, 유럽식으로 표기된 아랍 인명을 아랍어로 돌렸다가 다시 익숙한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의 피로도도 높았다. 서양 고대 철학, 중세 철학, 아랍 철학에 대한 교양이 깊어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 많아 프랑스어에 대한 이해가 아무리 깊다 해도 우리말로 옮길 때 문장 구성 자체가 힘들었고 하루 종일 매달려도 한 단락 끝내는 게 고작이었다. 그 한 단락의 완성도도 30퍼센트에 불과했다. 전업 번역자인지라 중간중간 다른 의뢰가 들어오면 생계를 위해 해야 했고, 이 책에서 도망치듯 새로운 책으로 넘어갔다가 돌아오길 반복했다. 올해에도 다시 의지를 불태우다가 끝내 “내 번역 키 높이를 훨씬 뛰어넘는 책”이라는 판단과 함께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냥 포기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번역 작업을 승계하도록 프랑스에서 서양 고대 철학을 10년 넘게 공부하고 돌아온 전문가에게 책을 보여주며 번역 가능성을 타진해보기도 했다. 라틴어, 희랍어, 프랑스어에 능통하고 철학사의 맥락에 해박한 이분께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루빨리 책에서 손을 떼는 게 좋겠다.”

많이 미안해하셨지만, 안 맡겠다고 고사하던 때 심하게 매달려서 부탁드린 우리가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첫 ‘자체 포기’의 이력을 만들어드린 게 특히 그랬다. 이런 마음을 담아 수용한다는 답신을 보냈다.

그 일이 있고 한 달 정도 뒤 메일 한 통이 날아왔다. 잘 아는 번역자로부터였다. 같이 한 번 작업해본 경험에 따르면 보통 꼼꼼한 분이 아니고 실력도 뛰어나다. 메일의 내용인즉슨 우리가 2년 전 의뢰한 책의 번역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지난해에 암 진단을 받아 수술 후 항암 치료, 방사선 치료를 마친 상태라고 했다. 처음 마음 같아서는 치료 기간에 편히 쉬면서 책도 읽고 번역도 하겠거니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피폐해져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한동안은 번역 작업이 어려울 것 같다는 메일이었다.

읽는 순간 너무 놀랐고 슬픔이 가득해졌다. 특히 “시간을 더 달라고 하는 게 맞는지 아예 포기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는 구절에서는 눈물이 왈칵 솟았다. 그래서 몸조리가 우선이라며 마음 편하게 푹 쉬시라고 했다. 이미 번역을 꽤 하셨으니 포기하진 말고 해외 출판사와는 계약을 연장하면 되니 조급해하실 필요는 전혀 없다고 말이다.

이런 일들이 겹치고 울적하던 즈음 편집 작업을 오래 끌던 책이 드디어 출간돼 책거리 비슷한 모임을 가지게 됐다. 국내에 스토아주의를 제대로 소개하는 책이 없던 참에 입문서로 적당한 프랑스 저자의 책을 번역한 것이다. 번역은 이미 몇 년 전에 끝난 터였으나, 마땅한 출판사를 구하지 못하던 차에 우리가 선뜻 나서서 출간이 이뤄졌다며 번역자가 술 한잔 산다고 해서 나간 자리였다. 담당 편집자와 지인까지 네 명이 조촐하게 한잔 기울이는데 술자리가 불콰해질 즈음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얼마 전 지인의 지인이 아랍 철학을 다룬 프랑스 책에 대해 물어보기에 포기하라고 얘기해줬다는 것이다. 귀가 번쩍 뜨여 이것저것 맞춰보니 얼마 전 장문의 메일을 받은 바로 그 책이었다. 무릎치고 기뻐할 일은 아니지만 소소한 우연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 책은 번역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책이라는 얘기를 추가로 들었다. 위기를 맞아 응전의 의지를 불태우기도 전에 확인 사살되고 말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추진했던 책을 불가피하게 접어야 할 때가 있다. 책을 쓰고, 옮기고, 만드는 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다. 책은 상품이면서 하나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 책을 포기할 땐 하나의 세계가 사라진다는 느낌도 든다. 어루만진 손길, 눈길과 함께.

강성민 |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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