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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인간이 번역 분야에서 인공지능(AI)을 이겼다고 상당히 떠들썩했던 적이 있습니다. 바둑 같은 영역에서의 연이은 패배에 너무 기가 죽어서였는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번역에서라도 지킬 수 있었던 것에 많은 이들이 안도감을 느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번역의 결과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기계보다 무려 5배나 긴 시간을 인간들이 사용한 결과이기에 어떤 기자가 지적했듯 ‘뒤끝 남긴 번역’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번역의 문제는 권력의 문제입니다. 인류 역사에서는 종종 번역이 불평등과 짝을 지어왔습니다. 영국이 홍콩을 점령했을 때, 홍콩의 번역자들 가운데에는 발 빠르게 조약의 내용을 남모르게 손보아 이권을 챙길 수 있도록 길을 터놓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원래 번역이라는 것은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다리를 놓아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숱한 사람들이 건널 수 있게 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번역이라는 일 자체는 이처럼 숭고하나, 불행히도 여기에서 사익을 취하는 예들도 허다했습니다.
지금도 힘과 돈이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좋은 번역가나 통역을 대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상당한 비용이 발생합니다. 어지간한 사람은 꿈도 꾸기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한국문학 가운데 외국어로 번역된 것이 손에 꼽을 정도이겠습니까. 이 점을 상기해본다면, 기계로 된 번역기나 통역기는 환영할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현재 기술로도 내용상 인간의 번역과 이미 큰 차이가 없을뿐더러, 어떤 영역에서는 속도도 빠르고 정확도도 높습니다.
번역의 다음 문제, 즉 인간에게 남겨진 다음 숙제는 평가입니다. 이제는 사람들을 영어도 못하는 사람, 일본어 못 알아듣는 사람, 이런 식으로 구분 짓고 폄하할 일이 아닙니다. 외국어 하나 안다고 뽐낼 일도 아닙니다. 이제 우리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바로 언어 너머의 언어, ‘메타언어’를 들여다봐야 할 시점입니다.
이중언어를 하는 아이들 가운데 한국에서 영어를 하는 아이들은 자신감이 넘치는데 중국어를 하는 아이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엄마가 한국말 잘 못하는 게 싫어, 학교에 못 오게 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요즘 중국어 공부 좀 한다는 한국 아이들 중에는 영어에 이미 자신감을 획득한 아이들이 많습니다. 이중언어도 모자라, 삼중언어로 이 사회가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모두는 못난 어른들 탓입니다.
이제 인간이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단순한 번역의 결과물이 아니라 이 좋은 번역기를 잘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번역 기계는 언제나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는데, 이는 한 인간이 수십년 동안 노력해도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경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태어나서 1년이 넘도록 온몸의 신경과 근육들을 집중해, “엄마”라는 말 한마디를 하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종알종알 말을 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한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지 모릅니다. 인간에게는 시간과 노력과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번역 기계는 이것을 이해할 리 없습니다.
번역기는 앞으로 더욱 성능이 좋아질 것이며, 인간은 이를 충분히 누릴 자격과 권리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언어를 다루는 인문계는 모두 문을 닫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인문계는 원래 단순 번역만을 하던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앞으로 특히 신경을 기울여야 하는 부분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지금의 언어보다 더 나은 언어를 쓸 수 있도록, 그리하여 더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해 갈 수 있도록 다른 인간을 도와줄 길을 찾는 것입니다. 또한 상대를 더 잘 이해하고, 그와 원활히 소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단순한 번역 작업 하나에도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의 작품이 제대로 번역되어 나오려면, 몇 달씩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짧은 언어가 사회적으로 걸림돌이었다면, 이제 이 한계를 기계의 도움을 받아 적극적으로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변지원 한국방송대 교수 <두 개의 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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