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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광화문을 지나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석방하라’는 시위대와 ‘이명박 전 대통령을 구속하라’는 시위대의 대립을 보았다. 두 그룹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 의미 있는 대화가 오가고 그 과정에서 합의점을 찾아내는 것은 가능할까? 올해 초에 비슷한 문제를 화두로 삼아 한해를 지나면서 내내 고민했지만 의미 있는 답에는 전혀 가까이 가지 못했다. 생각이 주변만 맴돌고 있다.

새해 벽두에 책에서 읽은 인지인류학자가 한 이야기를 수첩 첫머리에 써 두었다. “불굴의 비합리성에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최선의 수단과 희망은 집요한 합리성이라는 주장, 즉 사실들을 논리적으로 사용하면 언젠가 신성한 것을 끝장내고 갈등을 끝낼 수 있다는 주장은 열정에 지배당하는 우리의 천성에 대해 과학이 알려주는 가르침과 어긋난다.” 아마도 이 말이 가슴에 들어온 것은 당시에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갈등 상황들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리라. 일정을 체크하고 메모를 하느라 하루에도 수십 번 열어 보는 수첩에 적어 놓고 틈만 나면 생각했다.

근대를 지탱하는 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이라는 대전제에 대한 도전은 반세기가 넘게 계속되고 있다. 서양의 지적인 세계를 휩쓸었던 극단적인 회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시작했던 과학혁명의 전제,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나’까지만 의심하고 그 위에 명징한 이성으로 합리적인 세계를 구축하려는 노력은 성공적이었다. 생산력의 발전, 지적 경계의 확장, 그리고 경제적인 여건의 향상을 수반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생각하는 내가 딛고 있는 인식론적인 토대가 허약하다는 것은 철학자들의 눈에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경제학자들이 사후적인 설명에 능하지만 예측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인간의 비합리적인 행동과 연관이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이런 비합리성 때문에 인간이 더 크게 기대고 있는 과학기술, 혹은 과학기술에 의존한 구조물들이 허물어질까 늘 조마조마하다.

매일 쏟아지는 정치 뉴스를 보면 정치는 이념을 바탕으로 토론을 하거나 합리적인 추론에 근거해서 판단하는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싶다. 넘쳐나는 정보 속에 진실과 거짓은 은폐되고 감정과 열정에 호소하기 일쑤다. 가짜 뉴스에 근거한 이야기를 마음껏 퍼뜨리기도 하고 그것이 사람들의 정치적 선택을 바꾸는 일도 허다하다. 더 놀라운 것은 처음에 시작한 가짜 뉴스가 가짜인 것으로 밝혀져도 처음의 선택을 바꾸지 않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보아, 복잡한 세상의 모든 것을 계산할 도리가 없다. 철학적으로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뿌리는 허약하기 그지없다. 경제적 행위는 합리적인 계산으로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다. 목소리를 높여 악악대지 않고는 정치적 해결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뭐, 인간을, 그리고 사회를 자세히 관찰해서 얻어낸 이런 모든 결론들이 사실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생사의 기로에서 주어진 모든 자료와 조건을 파악하기 전에 행동을 해야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아니, 많다. 나중에 그것보다 나은 길이 있었다는 것을 오랜 분석 끝에 알 수도 있지만 이미 그때는 늦다. 최근의 학문적 성과들이 보여주는 인간의 비합리성은 그렇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던 진화의 산물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차원에서 보아도 서로 합의할 수 없는 타자가 있는 것은 인류가 한 방향으로 쏠려 절멸하는 일을 막는 비법이다. 본능에 더해 합리적인 판단이나 접근이 좀 더 생존에 유리하다면, 그리고 여럿이 사는 사회에서 갈등으로 인한 멸종을 막는 방법이라면, 포기할 이유는 전혀 없다.

한 해의 끄트머리에서 얻은 수확이 있다면, 현상은 비합리적이지만 합리성을 향한 노력은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또 합리적인 끝을 보겠다고 끝까지 버티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이제는 인간에게 너무 큰 힘이 주어져 있기에, 갈등을 끝내지 못하고 싸우다 멸종에 다다르지 않을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 시급하다. 다시 합리성이 등장하는 이유다. 복잡한 세상 문제를 합리적으로 다 따질 수도 없고 합리적으로 따질 시간도 모자라지만, 결말은 필요한데, 결말을 어떤 방법으로 끌어낼 것인가? 상대를 공격할 것인지, 여러 사람을 끌어들여 운동을 할 것인지, 시위를 하는 정도로 해결이 될까? 비록 그 해결 방법에 비합리적인 요소들이 많이 개입한다고 하더라도 목표는 합리적으로 세워 둬야 파국을 막을 수 있다. 새해엔 합리적인 목표를 세우는 방법과 갈등의 당사자들이 타협할 수 있는 조건을 담은 책을 하나 만들고 싶다.

<주일우 | 이음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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