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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자의식 때문인지 어디를 가든 그곳의 서점을 찾는다. 먼 곳, 먼 시간에서 온 사람을 만나면 그가 거쳐 온 서점 이야기를 듣는다.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해 맨부커상을 수상한 데보라 스미스의 고향은 영국 셰필드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 돈카스터라고 했다. 돈카스터를 도시라고 표현했더니, 그는 도시라고 하기엔 부족한 요소가 많다고 정정했다. 유럽의 도시에는 대개 교회와 시청을 중심으로 광장이 있다. 그 광장은 장이 서는 곳이고 시민들의 뜻을 전달하는 곳이다. 그리고 도시라면 그 주변에 우체국, 은행, 마트, 그리고 펍이 있고 다양한 상점들이 자리잡고 있다. 자족적인 삶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요소들 중에서 부족한 것이 있으면 다른 마을이나 도시에 의존해야 하니 도시라 부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곳엔 서점도 없었다. 그는 기차를 타고 서점을 다녔다. 런던이 아니라 굳이 셰필드에 서점과 출판사를 낸 그의 결정에 이런 기억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차를 타고 갈 수 있었던, 먼 거리의 서점이 그를 번역가, 문학가로 키웠다.
한시민이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있다. 이석우 기자
서울 변두리에 살던 내게 첫 번째 서점은 목욕탕 건너편, 구둣방 옆, 스무 평 남짓한 작은 가게였다. 변두리의 아이들이 시내까지 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매달 초, 잡지가 나오는 시기가 되면 새벗, 어깨동무, 소년중앙 같은 잡지들을 사러 들렀다. 하루라도 빨리 보려고 잡지가 나올 무렵엔 매일 갔다. 늦게 나오면 애를 태웠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뚜렷한 목적이 없이도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그냥 나오는 것이 미안해서 작은 서점에 절대로 없을 것 같은 책 제목을 하나 준비해 찾아달라고 하고는 시간을 보냈다. 주인아저씨도 어린아이의 얕은 속임수를 눈치챘을 법도 한데 한 번도 면박을 준 적이 없었다. 작은 서점의 책은 뻔해서 수준에 맞지 않는 책들도 꺼내보았던 것 같다. 그 책들은 친구들 앞에서 똥폼을 잡는 데도 쓰였고 나중에 공부를 할 때에는 실질적인 자양분이 되기도 했다. 아마도, 그때의 기억 때문에 내가 지금 책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계 어느 곳이든 서점을 찾아 여행에 지친 다리를 쉬기도 하고, 책과 잡지를 훑어보면서 떠나온 이유를 떠올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그곳에 앉아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만으로 시간을 보내도 아깝지 않다. 여행하는 곳마다 이런 휴게실을 가지고 있는, 나만 한 부자가 또 있을까? 그래서 여행을 떠나기 전이면 지도를 보면서, 혹은 인터넷을 검색해서 가볼 만한 서점을 점찍는다. 기대를 부풀려 서점을 찾는다. 늘 생각하던 것과 똑같은 서점을 만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크게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다. 이번에 중국 저장(浙江)성 우젠(烏鎭)을 방문하는 여행에서 낙점을 받은 서점은 상하이 쑹장(松江) 템스타운(泰晤士少鎭)에 있는 중수거(鍾書閣). 우리나라의 몇몇 지면에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라고 소개되었던 곳이다. 하지만 부풀었던 기대는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금세 쪼그라들었다.
중수거가 있는 템스타운에 들어서면서 깜짝 놀랐다. 상하이 외곽에 자리 잡은 5개 신도시 중에 하나인 이곳은 대부분의 신도시들이 대도시의 베드타운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과 같은 목적으로 조성되었다. 차를 타고도 한참을 가야 하는 규모. 크기가 작지 않다. 마을의 이름을 붙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영국 마을을 본떠서 만들었다. 월요일 낮에 방문해서 인적이 드물었지만 주민들이 출근한 전형적인 베드타운인데 모든 집들이 영국풍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거대한 테마파크 안에 가두다니 입이 쩍 벌어졌다. 런던의 템스강에 비교할 규모는 아니지만 옥스퍼드의 템스강 상류 정도는 되는 강이 하나 흐르고, 마을 중앙엔 영국 마을 어디서나 있을 법한 교회의 첨탑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모든 건물이, 예외 없이 영국의 구도시와 신도시에서 볼 수 있는 양식으로 지어졌다. 사람들과 간간이 보이는 한자를 제외하면 사진으로는 영국마을과 구분이 쉽지 않을 정도. 그 안에 있는 서점에도 나름 책을 분류하고 꾸미려는 노력이 보였지만 책이 아이디어에 치여 뒷전으로 밀린 느낌이었다. 책이 가장 좋은 인테리어일 수는 있지만 인테리어 자체는 아니라는 반감이 강하게 들었다.
일본의 쓰타야 서점 열풍 이후, 한국의 도서정가제 이후, 오프라인 서점들이 지점을 늘리기에 바쁘다. 서점에서 책을 매개로 갖가지 물건을 판다. 걱정은, 서점에서 책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것. 나라 밖의 친구들이 서울에 왔을 때, 꼭 찾고 싶은 서점을 만들어 볼 궁리에 마음이 바쁘다.
주일우 | 문학과지성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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