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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여적]가로등의 변신

opinionX 2019. 1. 15. 10:11

“가로등도 졸고 있는 비오는 골목길에 두 손을 마주 잡고 헤어지기가 아쉬워서 애태우던 그 밤들이…” 가수 김수희는 1982년 ‘못잊겠어요’를 발표, 옛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했다. 가로등은 기다림, 헤어짐, 반가움, 사랑이 오가는 곳이다. 시인 박인환도 ‘세월이 가면’에서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중략)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라고 했다. 가로등은 ‘자신의 위치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과 비유되기도 한다. “별처럼 보이지 않으면 어때. 그냥 조용히 빛나고 있으면 되지. 그게 내 할 일이잖아.” 일본 동화작가 하마다 히로스케의 그림책 <별이 되고 싶은 가로등>의 구절이다.

가로등은 인류에게 밤의 시간을 선물했다. 한국에서는 1897년 서울 종로거리에 ‘석유 가로등’이 처음 세워졌다. 1900년 4월10일에는 전구 3개가 달린 민간 가로등이 설치됐다. 이날이 바로 ‘전기의날’ 기념일이다. 당시 제국신문(帝國新聞)은 “밤마다 종로에 사람이 바다같이 모여서 구경하는데 (중략) 장안의 남자들이 아홉시가 지난 후에 문이 미어질 정도로…”라고 전했다. 가로등은 1982년 1월5일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면서 ‘밤의 수호천사’가 됐다. 가로등은 2017년 말 현재 146만1544개로 늘었다. 주택이나 건물 주변을 밝혀주는 보안등까지 보태면 그 수는 250만여개다. 가로등은 주로 주황색인데, 파장이 길고 산란이 적어 빛이 원거리에 도달한다고 한다.

묵묵히 길을 비추고, 수많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됐던 가로등이 변신 중이다. 정부가 ‘스마트 도로조명 플랫폼’ 개발에 착수했다. 가로등에 센서와 정보통신기술을 접목시켜, 교통사고 등 정보를 수집한 뒤 위험이 확인되면 이를 ‘디지털 사인’을 통해 도로 표면에 정보를 비추고 주변 차량과 행인의 스마트폰 등에 전달토록 한다는 것이다. 해외에선 가로등을 ‘드론 둥지’로 사용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생텍쥐페리는 <어린왕자>에서 다섯번째 별에서 만난 가로등지기를 “우스꽝스럽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라고 했다. “내가 아닌 남을 위해 정성을 들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 내 주변에서 가로등 같은 사람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김종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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