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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산책자]아부다비의 비전

opinionX 2019. 2. 25. 15:19

대학수학능력시험 평가에서 제2외국어를 치르는 학생들의 70%가 선택한다는 아랍어. 5지 선다 문제들을 모두 3번으로만 찍어도 4등급은 받는다는 소문에 너도나도 선택한 결과다. 작년에 4만7298명이 아랍어 시험을 봤다. 한두 문제만 틀려도 2등급인 다른 외국어 과목들과 달리 절반만 맞아도 2등급은 받는다. 2022년부터 제2외국어가 절대평가로 전환되면 이런 상황은 개선되겠지만 점수를 따는 게 모든 것보다 우선인 세태가 적나라하다.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아랍어를 공부하지만 정작 아랍 지역의 전문가도 드물고 좋은 번역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아부다비 디지털 출판 포럼(ADPF)’에 출장 가기 위해 아랍에미리트연합(UAE)과 이 지역에 관련된 정보를 얻으려고 책도 찾아보고 인터넷 검색도 해보았지만 만족할 만한 자료를 찾지 못했다. 오늘 방한하는 UAE의 모하메드 왕세제와 투자, 교역, 건설, 인프라 등의 영역에서 폭넓은 협력을 논의한다고 하고 두 나라가 ‘특별 전략적 동반자 관계’라는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결국은 아부다비나 그 도시가 있는 UAE에 대해 별다른 정보도 없이 도착했다. 물론 나는 아랍이 중세 때 유럽에 진출하고 유럽의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신의 영역에 정열을 쏟고 있던 시기에 그리스로부터 시작했던 지적 자원과 전통을 보존하고 발전시켰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도서관이 아랍 세계에 있었다. 유럽이 문화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세계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바탕을 만든 르네상스는 아랍 세계가 가지고 있던 책을 수도원에서, 대학에서 번역하는 작업으로 시작했다. 사막이 많고 척박했던 UAE는 그 시기에도 변방이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현대적인 아랍의 이미지는 오일머니와 곡예를 하는 것처럼 높게 솟은 건물들로 대표되는 이 지역이 차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접해 온 미디어에서 아랍은 석유 값의 변동 및 서방과의 갈등으로만 다루어졌다. 기껏해야 건설붐 속에서 오일머니를 벌어 이 나라의 경제에 힘을 보탰던 아버지들의 이야기나 운 좋게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주해서 큰돈을 번 재벌들 이야기가 더해졌을 뿐. 협소한 오아시스에서 농사짓고 낙타를 기르며 바닷가에서 진주조개를 잡아 살아가던 이곳 사람들의 역사를 이번에야 알았다.

UAE에는 100만명 남짓인 국민의 7~8배에 달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시민권을 내주는 데는 엄격하지만 허드렛일부터 고도의 지적인 작업까지 외국 사람들에게 맡기는 데 주저함이 없다. 개관한 지 1년여 된 아부다비 루브르는 건축부터 운영까지 가장 오랜 경험과 전문성을 빌려왔다. 사막 위의 루브르는 형용모순에 가깝지만 그 전시나 전시방식, 그리고 운영은 예사롭지 않다. 장 누벨이 설계한 바닷가의 건물들 안에서 공자와 붓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함께 관람객을 맞는다. 멀지 않은 곳에 장학금이 후하기로 유명한 뉴욕대 아부다비 캠퍼스가 있다.

아부다비국제도서전의 운영도 세계에서 제일 큰 도서전을 운영하는 프랑크푸르트도서전이 맡아서 했다. 최근에야 결별을 했는데 미국에서 온 친구들이 운영이 예전과 달라졌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아부다비의 정책 담당자들은 이제 배울 만큼 배웠고 스스로 운영할 만해서 홀로서기를 시작하는 것이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글쎄. 서방 친구들의 우려나 아부다비 친구들의 자신감 사이에서 쉽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세계 최고를 고용해서 배우고 이제 스스로의 길을 찾아나가는 아부다비 친구들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

적어도 아부다비의 정책 입안자들이 가진 미래에 대한 비전은 높이 사줄 만하다고 생각한다. 돈이 있기 때문이긴 하지만 세계 최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행착오를 최대한 줄이면서 가장 빠르게 문화적인 수준을 높이고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참가한 포럼에서 들은, 그곳의 독서율은 깜짝 놀라울 정도로 낮았다. 코란 암송에서 비롯된 구술 전통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변명이 무색할 정도로 낮았다. 하지만 정책입안자들이 독서율을 높이기 위한 방향을 세우고 노력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종이책 보급으로 답을 찾기 난망하다고 판단해서 전자책과 오디오북 중심으로 기술을 들여오고 콘텐츠를 채우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환경과 위험의 문제를 충분히 고려한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을 뒤로 미루면 전 세계를 한 세기는 지탱할 석유를 가지고 있는 이 사람들이 원전을 짓고 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를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우리도 눈을 들어 앞을 봐야 하지 않을까?

<주일우 이음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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