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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3·1운동 100주년이다. 솔직히 내가 3·1운동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국사책과 참고서에서 보았던 정보 이상은 아니어서 아무리 늘려 잡아도 몇 쪽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시험대비용 연표 속에 넣어 외운 것들이라 납골당 유골처럼 가지런히 죽어 있다. 내게는 1894년의 청일전쟁, 1905년의 을사조약, 1910년의 경술국치 하는 식으로 1919년의 3·1운동인 것이다. 인물들도 그렇다. 아이들이 단어장처럼 외워 부르는 ‘역사는 흐른다’의 노랫말처럼 “삼십삼인 손병희, 만세만세 류관순”일 뿐이다.

이런 내게 3·1운동에 대해 완전히 다른 인상을 심어준 글이 있다. 몇 년 전 우연히 읽은 함석헌의 글 ‘고난의 의미’다. 글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교회에서 행한 강연을 녹취해 정리한 것이다. “제가 지내봤던 삼일절 얘기나 조금 하겠습니다.” 글머리에서 깜짝 놀랐다. ‘제가 지내봤던’이라는 말 때문이다. 나는 한 번도 ‘내가 겪은 3·1운동’을 들어본 적이 없다.

“저는 삼일절을 평양에서 지냈습니다.” 당시 그는 평양고보 3학년생이었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일가의 형님이 만세운동을 기획했던 그룹의 일원이었던 모양이다. 그 형님에게 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 이야기를 들었고 학생들을 조직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함석헌은 친구들과 선언문을 밤새 찍어서 고종 추도식이 열리던 숭덕학교로 갔다.

“나는 그때 평양관 앞에 있는 경찰서 부근을 맡았어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평양의 3월1일과 2일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이 강연록에는 내가 들어보지 못한 뒷이야기들도 많다. 당시 엘리트였던 평양고보 학생들이 태극기가 어떻게 생긴 건지 몰랐다는 이야기도 그렇고(당시 태극기를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됐을까), 민족대표 33인을 둘러싼 이야기들도 그렇다. 선언문에 들어갈 민족대표의 이름 중 누구를 맨 앞에 세울 것이냐를 두고 옥신각신할 때, 이승훈 선생이 자신을 추대하는 사람들에게, “이건 죽는 순서란 말이야. 손병희를 먼저 써!”라고 했다는 감동과 웃음을 자아내는 야사까지 들어 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인구의 10분의 1이 참여했다는 만세운동. 부끄럽게도 관련 서적 한 권 읽어본 적 없는 나로서는 이 일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다만 사람이 운동을 낳기보다 운동이 사람을 낳는다고 믿기에, 이 운동으로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새로 태어났을까를 생각해볼 뿐이다. 민족과 국가의 독립을 외친 이때가 조선에서 근대적 민족과 국가의 이념이 만들어진 때가 아니었을까. 왕의 죽음과 더불어 등장한 이들이 주권자 인민이 아니었을까. 주권을 상실한 상태로 주권 관념을 처음 갖게 된, 다시 말해 식민지인 형상을 한 주권자 인민 말이다. 내 딴에는 서구의 근대 혁명에 대한 짧은 지식을 변용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함석헌 선생의 생전 모습 (출처:경향신문DB)

그런데 함석헌의 이야기를 꺼낸 건 국가나 민족과는 다른 차원에서 만세운동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도 그때 들었어. ‘여러분이 다 나라의 주인이니까 누굴 믿지 말고 다 일어서서 만세를 불러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독립이 됩니다.’ 그런 말 사천 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들어본 소리거든요. 단군이 계실 땐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국가라고 이름을 걸고 한 이후에 언제 그런 말을, 더구나 평안도 놈들이 들어봐요?” 함석헌은 당시 이승훈의 연설에서 사람들이 받은 충격을 그렇게 요약했다. 그때 사람들이 처음 들어본 것은 ‘나라의 독립’이 아니라 ‘당신이 주인’이라는 말이었다.

함석헌에 따르면 3·1운동은 본질적으로 ‘나도 사람이오’ 하는 운동이고, 다른 이들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운동이다. 그의 이야기를 곰곰이 따져보면, 3월1일의 만세라는 것이 국가의 독립에 대한 자각이기 이전에 사람에 대한 자각임을 알 수 있다. 자주민이란 한 민족의 다른 민족에 대한 권리이기 이전에, 사람이 자신이 사람임을 깨닫는 것이고 자기 앞에 선 사람 또한 사람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집단적 만세의 체험은 종이 아닌 주인의 체험이고, 세상 사람들과 한 몸이 되는 체험, 즉 인류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체험은 열매맺음이 아니라 싹틈의 체험이다. 안창호의 말을 들었을 때 이승훈의 맘속에서 일어난 일이고 이승훈의 말을 들었을 때 함석헌의 맘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함석헌은 3월1일의 사람들을 <히브리서>에 나오는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보았다. 모든 사람이 사람이 되고 모든 인류가 인류가 되는 성취는 그들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만 자기 맘속에서 일어난 일을 알아차리고 제 노릇을 할 뿐이다.

함석헌은 그것을 고난이라고 불렀다. 고난이란 징후(증거)와 약속 사이에 있는 것이다. 징후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성취를 미리 약속받은 자에게는 고난이 없다. 고난은 징후를 알아차린 자가 약속을 받지 못했을 때 생겨난다. 징후는 있으나 약속이 없다. 그때 당신은 사람 노릇을 할 것인가. 당신은 기꺼이 지고 죽으며 다만 옳게 죽기를 바랄 수 있는가. 성취를 보장받지 못한 채로도 당신은 맘속에 일어난 변화를 증언하는 만세를 부를 것인가.

참고로 함석헌의 강연은 1987년 3월1일에 있었다. 박종철이 죽고 6월항쟁은 일어나지 않았던 때 그는 청중들을 약속 없는 징후와 대면하게 했다. 그들을 그렇게 3월1일의 물음 앞에 세웠던 것이다.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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