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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산책자]우리들의 링

opinionX 2017. 1. 23. 10:55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이런 시적인 역설로 시작한 정초. 도매서점 부도 소식에 온 세상이 함께 울어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진 게 탄식밖에 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나를 근심스레 바라보며, 그래도 웃는 게 낫다고 말하는 출판인도 만났다. 왜 있잖은가, 내가 링에서 쉽게 내려갈 성싶으냐, 기권 항복 수건을 던질 수 있는 독자들이 그대로 지켜보고 있는데, 선수인 내가 라운드를 다 끝내야지라는 심정.

내 코너로 돌아가 피 냄새 나는 입속을 헹구고 세상의 코치인 독자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출판을 해야 할 것인가 묻고픈 간절함이 있었다. 나름의 펀치를, 나만의 감각을 유지하며 날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링이 휘청거렸다. 허탈했다. 피해 액수가 얼마냐고들 묻는다. 액수가 웬만한 출판사보다 크지 않다고 답하자 그렇다면 그리 흥분할 거 없잖냐고 눈총을 받았다. 링이 흔들렸는데 내가 덜 맞았다고 가만 있을 수는 없는 것.

“텅/ 네 밥그릇처럼 내 머릿속/ 텅// 아, 잔인한, 돌이킬 수 없는 하양!/ 외로운 하양, 고통스런 하양,/ 불가항력의 하양을 들여다보며// 미안하고, 미안하고, 그립고 또 그립고” 하며  황인숙 시인의 시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를 떠올린다. 해방촌 길고양이들 밥을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챙기는 시인이 텅 빈 밥그릇을 보며 품은 회한이 ‘미안하고 그립다’다. 나는 부도 이후 잠긴 도매서점 창고에서 빛을 보지 못하는 책에 미안하고, 허약한 의미 있는 출판 행위가 강력히 그립다. 조금의 과장 없이 나에겐 불가항력의 감정들이다. 내야 할 책들은 여전히 많고 그 책의 운명과 끝까지 함께하고 싶기에.

작년 말 한 방송국에서 새해 출판계획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나와 달라는 청이 있었다. 간단한 질문지를 받았고, 답을 위해 몇 문장을 마련해 읽어보기도 했다. 그런데 도매서점 부도 이후 정작 방송에서 진행자의 질문이 바뀌었다. 세상 흐름을 자연스레 접목하는 것이 특성인 방송이기에 부도 소식과 출판 불황에 대한 질문을 빠뜨릴 순 없을 것이다. 너무도 많은 생각을 했던 주제여서 외려 쉽게 답했다. 방송국에서 돌아오면서 하고픈 말이 더 있었는데 싶었다. 가령 이런 것이었다. 출판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흔하게 질문하는 것 중 하나가 한국 출판계에는 왜 이렇게 소규모 출판사가 많은 것인가다. 창업도 쉽고 그래서 1인 출판사도 적지 않은데, 이것이 출판산업을 허약하게 만드는 것 같다는 진단을 포함한 의문.

나는 그런 작은 출판사들이 각자 색깔 어여쁘게 꽃피우는 것이 출판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소규모 출판사에서만 낼 수 있는 개성적인 책이 있다. 큰 규모의 출판사에서는 기획 시리즈나 호흡이 긴 책을 낸다면 작은 출판사에서는 순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책을 내는 것이다. 독자 입장에서는 시리즈물도 필요하지만 마니아틱한 책도 필요한 것 아닌가. 백화제방, 다종의 꽃밭이 아름답다. 그렇다면 문제는 경제적으로 어떻게 ‘버틸’ 것인가이다. 링에서 뛰고 있는 선수의 각오로 다시 말할 수 있다. 링이 튼튼하기만 하다면 기량껏 체급별로 뛰어볼 수 있다고. 출판 유통 환경, 도서관 정책, 책의 공공성 공유, 이런 토대가 링이 되어주는 것이니까.

여러 문화 장르 중에서 책은 가장 조용하고 낡은 듯하나 그 책을 여는 순간 우리의 영혼은 거세게 흔들릴 수 있다. 적어도 지식과 사유를 갈구하는 사람을 소외시키지 않는다. 다른 역동적인 매체에서 즉흥적인 리듬을 타듯 실시간 정보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으니 집중력이 필요한 책 읽기는 점점 어려워질 수도 있다. 먹고살기 힘들고 시간도 없다는 이유도 알겠다, 그래서 책 읽기는 필요가 아니라 즐거움이 되어주어야 한다. 바빠도 끼니를 챙기는 것처럼 책 읽는 즐거움에 일상을 맡길 수 있다면, 먹고살기의 가치가 달라질 수 있으니까.

현실적인 어려움 앞에서 뭔가 포기하거나 적당히 타협하고 싶을 지점에 이르면 이러려고 출판을 시작했던 것은 아니잖은가 스스로에게 다그친다.

그래 본디 책은 동요와 불안 속에서 태어난다고 철학자 장-뤽 낭시가 간파했다. “그렇게 애를 태우며 펼쳐지고 진정되기를 갈구하며 스스로를 찾아나가는 어떤 한 형태가 발효되어 탄생하는 것이다”라고.

자, 그러니까 나는 비어 있는 밥그릇을 바라보며, 못다 한 사랑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으로, 동요와 불안 속에 태어나는 책을 만들기 위해 내 코너로 돌아간다. 독자들의 코치를 들으며 다시 링에 나오기 위해서. 근데 상대 선수가 누구냐고? 그야 출판 행위에 시니컬해지는 나 자신이지 누구겠는가.

정은숙 |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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