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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에도 맛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이십여 년 전, 소설 쓰는 선배가 들려준 말인데 요즘도 가끔 생각난다. 화가 나거나 슬플 때 솟구치는 눈물은 짜다고 한다. 반면, 기쁠 때 나오는 눈물은 달다고 하는데, 이건 문학적 과장으로 들린다.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눈물 맛을 제대로 맛보지 못했다. 간혹 눈물을 쏟을 때가 있지만, 그때마다 누선을 자극한 격한 감정으로부터 한걸음 떨어지기가 힘들다.

얼마 전에도 기회를 놓쳤다. 혼자 극장에 갔다가 눈시울이 뜨뜻해져서 혼이 났는데 이번에도 눈물 맛을 볼 겨를이 없었다. 지인들이 적극 추천한 영화였다.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 영화를 보지 않았다간 지인들이 사람 취급을 하지 않을 태세였다. 대강의 줄거리는 알고 있었다. 감독에 대해서도 조금 알고 있는 터여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보신 분들은 새삼스럽겠지만 영화는 드라마라기보다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가 수년에 걸쳐 사전 조사를 마친 뒤 촬영에 들어갔다고 한다. 무대는 영국 뉴캐슬. 병을 앓던 부인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중년의 목수 다니엘 블레이크는 심장병을 앓고 있는 데다 실직 상태다. 다니엘이 지원금을 받기 위해 관청을 찾았다가 런던에서 이사 온 케이티와 마주친다. 케이티는 홀로 두 자녀를 키우는 ‘싱글 맘’인데, 말 그대로 무일푼이다.

첫 장면부터 강렬하면서도 익숙하다. 의료 전문가가 질문을 퍼부어대고 다니엘은 말문이 막혀 어처구니없어 한다. 의료 전문가는 국가-갑으로서 충실하고 다니엘은 국민-을로서 왜소해진다. 다니엘과 케이티는 국가가 합법적으로 운영하는 제도와 절차 앞에서 서서히 무너진다. 다니엘은 상담 창구와 인터넷 사이트, 이력서와 청구서 앞에서 매번 절망한다. 생리대 살 돈조차 없는 케이티는 급기야 매춘굴에 한발 들여놓는다. 영화는 다니엘이 구직센터 외벽에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고 쓰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실직자 다니엘과 케이티가 영국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인간은 없고 제도만 있는, 국민은 없고 국가만 있는, 시민은 없고 공무원만 있는 영국의 사회복지 제도가 우리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촛불 정국이 아니었다면, 두 실직자가 국가로부터 배제되는 과정에 집중했을지 모른다. 국가의 합법적 폭력에 초점을 맞췄을지도 모른다. 나는 영화에서 우리의 ‘촛불’을 보았다. 내게는 다니엘과 케이티를 앞세운 켄 로치의 영화가 ‘있지만 없는’ 국민에게 바치는 진혼곡이자 곧 탄생할 시민을 위한 출정가로 보였다.

다니엘이 ‘자존심을 잃으면 사람이 아니다’라며 관청 흰 벽에다 자기 이름을 쓰는 장면. 분노와 모멸감의 끝에서 다니엘이 뿌리는 스프레이가 곧 촛불이었다. 다니엘의 1인 시위를 향해 환호하며 동참하는 행인들 또한 엄연한 촛불이었다. 촛불은 최근의 대한민국에만 국한된 예외적 상징이 아니었다. 영화는 다니엘의 초라한 장례식에서 끝나는데, 다니엘이 관청에 제출하기로 했던 항고이유서가 유언처럼 낭독된다. 케이티가 대신 읽은 다니엘의 메시지는 “나는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로 요약되는 인간 선언이었다. 신자유주의 종주국 중 하나인 영국에 대한 비판이자, 반드시 되찾아야 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옹호였다.

영화가 장례식 장면으로 끝나는 것이 의미심장했다. 다니엘의 장례는 시장 전체주의 아래서 신음하는 전 세계인(소비자)들을 위한 ‘주권자 선언’이었다. 다니엘이 외쳤듯이 우리는 개가 아니다. 그렇다면 케이티를 포함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촛불이라면,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대의제에 의해 운영되는 국가의 폭력으로부터, 생산력 우선주의가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하는 시장 논리로부터 인간을 구출할 수 있는가. 오직 생산과 소비 능력만으로 인간의 가치를 따지는 산업자본주의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는가.

극장을 나오면서 떠오른 것이 기본소득이었다. ‘개가 아닌 인간’의 사회, 주권자로 거듭난 시민들의 공동체로 가는 가장 빠른 길 가운데 하나가 기본소득이다. 마침 ‘녹색평론’ 최근호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관점과 만났다.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기본소득의 가능성을 확인한 인류학자 제임스 퍼거슨의 <분배정치의 시대>라는 책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지 말고 ‘물고기’ 자체를 주라, 그것도 현금으로. 퍼거슨 교수가 제시하는 대안이다.

퍼거슨 교수는 생산이 분배의 토대가 아니라, 분배가 생산의 토대일 수 있다고 말한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 자녀를 교육시키는 부모를 보라는 것이다. 일자리가 생긴다 해도 대부분의 노동과 임금이 더 이상 생존의 요건이 되지 못하는 시대, 99%가 잉여로 전락하는 시대다. 인간을 재정의하지 않고서는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상황이다. 인간은 원래부터 상호의존적 존재이며, 사회는 공감과 연대에 의해서만 지속가능하다는 ‘오래된 미래’를 지금 여기로 초청해야 한다. 그러면 국가 전체가 생산한 부를 모든 국민이 떳떳하게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퍼거슨 교수의 저서가 켄 로치의 영화처럼 눈물샘을 건드릴 리 만무하다. 하지만 노동이 아니라 사회에서, 탐욕이 아니라 도덕성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으려는 ‘분배정치’가 도래한다면, 그때는 정말 다디단 눈물이 뉴캐슬과 광화문뿐 아니라 전 세계 광장을 가득 메울 것이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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