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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꺼리는 어투는 ‘그렇대’처럼 간접경험의 어미가 섞인 것이다. 정보의 출처는 분명하지만 그 사안에 대해서 자신의 판단이나 생각은 보류한 대화를 지속하다 보면 피로감이 몰려온다. 원인은 삶에 정보가 흘러넘치기 때문이다. 대다수 정보들은 부질없이 흘린다. 그러므로 고유한 확성기를 갖추고 내 목소리를 내야 하는 시절이다. 정보 ‘거르기’와 정보에 ‘맥락 부여하기’가 그래서 중요하다.

미술관, 박물관에서 사용하던 ‘큐레이션’이란 말이 우리 생활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오픈사전 정의로는 ‘여러 정보를 수집, 선별하고 이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전파하는 것’을 말한다. 본래 예술작품을 수집, 보존, 전시하는 일을 지칭했으나 최근에 폭넓게 쓰이게 되었다. 이젠 정말로 ‘안목’의 가치가 인정받는 것이다.

2년 전 영국 저자 마이클 바스카의 <큐레이션>을 읽고서 정보 과잉 사회에서 선택과 집중의 의미를, 선별과 배치의 감각을 함께 고민한 적이 있다. ‘과감히 덜어내는 힘’이라는 부제가 명료했다. 출판계에서도 서점·유통계에서 ‘큐레이션’은 거의 외래어처럼 흔하게 사용되고 이물감이 없다. 하루에 출간되는 신간량과 서점에 진열되는 종수의 불일치는 큐레이션 작업이 없이는 극복할 수 없다. 그것이 원체 서점의 일이다. 다만 공간 창출의 의도, 큐레이션의 목적이 중요하고 늘 격려 혹은 의심을 받는 것이다.

며칠 전 마이클 바스카가 ‘콘텐츠 과잉 시대, 북큐레이션의 중요성’을 직접 발표하는 현장에 다녀왔다. ‘2018 책의 해’의 사업으로 매달 열리는 ‘책 생태계 비전 포럼’의 아홉 번째 주제가 ‘북큐레이션의 힘’이었는데, 거기서 그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사례로 든, 미국인이 매일 소비하는 정보량은 신문 175개에 해당한다. IBM에 따르면 전 세계는 현재 매일 250경바이트 이상의 데이터를 생산해내고 있다. 페이스북은 매일 25억건의 콘텐츠를 처리하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인류가 생산한 데이터의 양은 나머지 인류 역사의 양을 합친 것보다 많다. 이처럼 놀라운 생산 속도를 따라잡을 사람은 없다. 자신과 무관한 정보를 따라잡느라 낭비할 시간도 없다. 결국 큐레이션은 정보 더미에서 어떤 숨 쉴 간극을 만들어내는, 인생을 벌어주는 일인 것 같기도 하다.

마이클 바스카에게서 처음 ‘큐레이션’ 용어를 접했을 때는 편집자로서 출판 편집의 개념과 유사하다고 인식했다. ‘일정한 방침 아래 여러 가지 재료를 모아 신문, 잡지, 책 따위를 만드는 일’이 큐레이션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원고라는 형태의 재료는 단순히 정보가 아니지 않은가. 오랜 노력의 결실이며 그 자체로 어떤 지성이 큐레이션된 결과물이다. 결국 나는 큐레이션을 단순 편집보다 훨씬 확장된 개념으로 봐야 했다. 책과 책, 사고와 사고를 잇는 일, 그러니까 맥락을 만드는 일. 그 길을 찾아내 지도를 그리는 감각이 큐레이션이다, 라고.

한국에도 진출한 넷플릭스는 나날이 회원이 증가하고 있다. 넷플릭스의 큐레이션이 블록버스터의 몰락에 일조했다는 것이 마이클 바스카의 주장이었다. 우리 모두는 생활 속에서 무엇이든 큐레이션한다. 어떤 분야든 큐레이션 작업은 정보를 거르고 취사선택하는 안목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큐레이션이 성과를 거두려면 전문적인 수준의 교양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것이 기업에만 필요한 역량일까? 글쎄. 넷플릭스의 방대한 콘텐츠 속에서 헤매다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느낄 것이다. 큐레이션은 누구보다 우리 개인에게 필요하다. 언제까지 빅데이터의 알고리즘에 토대한 큐레이션을 자신의 취향이라, 자신의 선택이라 믿을 순 없으니까. 정말로 취향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 개인이며 인간이고, 그런 큐레이션이 더 고유하고, 정확하고, 인간적이고, 가치 있다. 최근 세계적인 인터넷서점 아마존에서도 자동 추천 알고리즘에 의존하지 않고 인력을 다시 투입하고 있는 것은, 역시 인간적인 안목의 큐레이션 의미를 입증하는 것이다.

“항상 더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가치는 절대적인 양보다 그것을 얼마나 잘 큐레이션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보보다는 지식, 지식보다는 안목이 큐레이션의 관건이다. 잘 정선된 정보, 묵직한 지식의 기록물인 책의 가치를 생각한다. 또 이렇게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정보 포화 상태에서 판단장애를 일으키지 않는 방법, 길을 잃지 않는 것은 역시나 안목 높은 판정관을 내 안에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은숙 |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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