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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경제보복이 철저한 계산에 따른 기습공격이며 한국은 준비 없이 뒤통수를 맞았다는 인식은 문제가 있다. 특별한 근거가 없다면 미리 이런 식의 추정을 해야 할 이유는 없다.

태평양전쟁은 일본이 잘못된 계산을 한 가장 대표적 사례다. 1942년 당시 일본은 승승장구 중이었다. 조선과 중국의 일부, 위만주국, 동남아의 여러 섬을 장악해 소뿔처럼 휜 제국 판도를 그리고 있었다. 일본이 태평양으로 뻗어나올 기세를 보이자 미국이 이런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석유 수출을 금지시킨 것이다. 석유의 대미의존도가 50% 이상이었던지라 배신감을 느낀 도쿄 권력의 최상층부는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마침 인구 팽창과 도시 집중으로 주거와 식량, 임금 등 여러 사회문제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군국주의적 팽창에 모든 걸 쏟아붓다보니 내부 살림에 물이 새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눈에 자원이 많은 필리핀이 특히 탐스럽게 여겨졌다. 그때 미국이 많이 먹었으니 그만 먹으라고 제동을 건 것이다. 하지만 욱일승천 중이던 쇼와 군부는 강공을 택했다. 히틀러와 손잡고 전쟁을 준비하면서 대미 협상에 나선 것이다. 이런 이중 행보가 몇 번이나 탐지되면서 미국 또한 협상의 문턱을 더 높여버렸다. 히로히토 천황은 어떻게든 외교적 해결을 봐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내각과 군부는 격론 끝에 ‘전쟁만이 답이다’로 달려갔다. 마치 전쟁을 하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 이들처럼 화친론자들을 몰아부쳤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점은 일본 정치의 시스템적 문제다. 

당시 일본 정치는 군부에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문민정부라 할 고노에 내각이 협상을 추진하려 했으나 이런 저자세는 옳지 않다고 보는 젊은 장교들에게 끊임없이 암살 위협을 받았다. 또한 고노에 내각은 육군장관 공석 작전에 발목이 잡혔다. 내각에서 육군의 견해에 반한 결정이 나면 육군장관이 사임하는 식이다. 새로운 인물을 불러 앉히려고 몇 번 시도했지만 모두들 자리를 고사했다. 육군장관이 공석인 채로는 내각회의가 열릴 수 없었고 중요한 결정을 승인할 수 없는 시스템상의 허점을 노린 전략이었다. 결국 고노에는 사임하고 도조 내각이 들어섰다. 도조 히데키는 매우 국수적인 군인으로 내각총리대신을 맡아 나라를 태평양전쟁으로 몰아넣었다.  방법은 기습이었다. 러일전쟁 당시 기습을 통해 초반에 러시아 함대를 무력화 했던 일본은 이번에도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 미국의 앞마당이라 할 진주만을 성공적으로 강습한 뒤 타이완과 필리핀에서 미군의 반격을 손쉽게  물리치는 등 초반 전세는 파죽지세였다. 

하지만 일본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괴물 같은 생산성을 예측하지 못했다. 진주만에 있는 미 태평양함대를 파괴하고 초반에 승부를 결정지으면 미국이 협상의 자세를 보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태평양 너머에선 끊임없이 새로운 항공모함과 비행기와 탱크와 화염방사기가 건너왔다. 동남아 쪽을 줄줄이 잃기 시작한 일본은 1945년 들어 해군력과 공군력이 전부 파괴돼 제로베이스가 되었고 미 B-29 폭격기는 아무 견제도 받지 않고 도쿄의 국회의사당 위를 날아 도심에 소이탄을 퍼부었다. 이 대화재로 10만명이 넘는 이들이 죽었지만 군부는 1억 총옥쇄로 산산이 부서지자며 대중을 선동했다. 그러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졌고 그 이후의 결론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지금 일본의 아베와 내각의 주요 인물들은 이성적이길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들어보이고 힘을 과시하고 있다. 여전히 과거의 자신들이 옳았다고 믿는 것일까? 하지만 단추를 잘못 끼웠다. 그것을 외교적으로 풀어 제자리에 다시 채우지 않는 한 부작용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자신들의 달콤한 소프트웨어로 국제사회에서 좋은 이미지를 얻고 있는 일본은 사실은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전형적인 이중잣대의 나라다. 이것이 태평양전쟁에서 배운 유일한 교훈일지도 모른다. 무기력한 시민사회는 하나의 당이 장기집권하며 병들어가도 선거라는 수단으로 그 권력의 공고함을 허물어내지 못한다. 오히려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치게 강해 문화적 상대성에 대한 감각이 약하다. 늙은 나라이고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는 나라다. 이번 기회에 무역전쟁을 제대로 치러낸다면 국제사회에 이런 일본의 면모가 널리 알려지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산업 생산성을 예측하지 못했지만, 작금에는 동아시아 각국이 과거의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기억은 약해질 수 있지만 폭력과 불의 앞에선 다시 살아나 연대할 수도 있다.

<강성민 |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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