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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관계란 누군가가 다른 누구를 우월적으로 지배하는 관계다. 권력은 곳곳에 있다. 정치판에서, 관청에서, 법정에서, 군대에서, 회사에서, 학교에서 사람들은 권력을 행사하고 권력에 지배당한다. 누구나 두려워하는 권력자가 되고 싶은가? 여기 아주 효과적인 길이 있다.

전국시대의 송나라 강왕은 형의 왕위를 찬탈한 자이고 포악하기로 이름이 났다. 그가 재상인 당앙에게 물었다. “과인이 살육한 자들이 많은데도 군신들이 갈수록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당앙이 대답한다. “왕께서 죄를 물은 것은 모두 좋지 않은 자들입니다. 좋지 않은 자들만 죄를 물으니, 좋은 자들은 이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왕께서 군신들이 모두 두려워하기를 바라신다면 좋은 자와 좋지 않은 자를 가리지 말고 닥치는 대로 죄를 물으십시오. 이와 같이 하면 군신들이 두려워할 것입니다.” 얼마 안 있어 강왕이 당앙을 죽였다. <여씨춘추> 중 ‘음사’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저자는 이야기 끝에 “당앙이 대답한 것은 대답하지 않은 것만 못하였다”라고 하여 악한 자의 말로를 논하였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 이야기가 법치주의와 관련하여 가지는 함의다. 순자는 강왕이 당앙에 의하여 나쁘게 ‘물들여졌다’고 한 바 있다. 그렇게 실컷 나쁜 짓을 가르치긴 했으나 그래도 선생인데, 배운 자가 배운 걸 써먹는다고 가르친 자를 죽인 것이다. 그만하면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강왕을 두려워하게 되었을 것이다. 잘해도 죽고 잘못해도 죽는 세상, 살길은 왕의 눈에 거슬리지 않는 길밖에 없다. 법 따위는 소용없게 된 것이다. 오늘날 법학에서 말하는 법적 안정성이 무너진 상태에서, 송나라에 남은 것은 벌거벗은 권력의 횡포였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송나라는 강왕의 대에 망했다.

두려운 권력자가 되는 방법은 또 있다. 어제 한 말과 오늘 하는 말을 다르게 하는 것이다. 들쭉날쭉하여 상대가 종잡을 수 없게 한다. 전국시대의 진나라 효공 치하에서 좌서장 상앙은 변법(變法)으로 법치를 확립한 사람이다. 태자가 법을 어기자 법에 따라 그의 스승인 공자 건의 코를 베어냈다. 같은 스승인 공자 공손가는 살에 먹실로 죄명을 써 넣는 형을 당했다. 상앙의 법 집행은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한번은 석 장 길이의 나무 한 그루를 도시 남문에 세우고 이것을 북문으로 옮긴 백성에게 십금을 주겠다고 방을 걸었다, 아무도 감히 옮기는 자가 없자, 이번에는 오십금을 주겠다고 하였다. 누군가 나무를 옮기자 그에게 약속한 오십금을 주었다. <사기>의 ‘상군열전’이 보고하는 유명한 이목지신(移木之信)의 고사다. 이것은 백성이 권력자의 약속을 믿게 하려는 처사다. 그 후 진나라는 융성하여 결국 천하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권력 강화의 관점으로만 치자면, 상앙을 쓴 효공은 수가 얕았다. 상앙이 오십금을 주는 데까지 내버려 두었다가, 다음날 상앙과 상금을 받은 자의 죄를 물어 목을 베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서 이렇게 호령한다. “겨우 나무 한 그루 옮기는 일에 오십금을 준다는 것은 본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벼슬자리에 앉아 이런 터무니없는 약속을 내걸어 백성의 인심을 얻어 보려 한 자의 죄가 크다. 그걸 받은 자의 죄도 작지 않다.” 이쯤 되면 다음날부터 백성들은 관의 약속 따위는 믿지 않고 그저 눈치만 볼 것이다. 약속의 신뢰성 따위는 더 이상 따져볼 일이 아니게 된다. 이렇게 막 나가는 것, 이중의 기준을 사용하는 것이 무서운 권력자가 되는 길 중 제일이다. 

이 시대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밉보이면 그 자의 사돈의 팔촌까지 조사하고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죄상을 만들어 내어,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걸 만천하가 알게 한다. 같은 죄를 놓고도 반대 진영에서 저지르면 득달같이 밝혀내고 권력자에 가까운 사람이 하면 조사하는 둥 마는 둥하며 세월을 보낸다. 이래야 권력 무서운 줄 안다. 이쯤 되어야 모두들 법이란 것이 누구에게는 호랑이 같고 다른 누구에게는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아, 오직 전전긍긍하며 권력자를 두려워할 것이다. 

법치주의란 무엇인가. 바다 건너 서양에서 온 법치주의는 권력의 일탈과 남용에 대한 견제를 말하는 것이다. 교과서의 설명은 퍽 복잡하지만, 단순하게 풀이하면 권력의 행사를 법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날 우리 사회에서 권력자가 “법대로 하겠다”라고 하는 말의 진의는 때로 “너 죽었다”라는 말과 같았다. 다만 벌하는 수단과 방법이 법이란 뜻이다. 피치자의 “법대로 하십시오”라는 말은 그나마 법대로 해 달라는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남과 다르게 또는 전과 다르게 취급하지 말아 달라거나, 법이 정하는 대로 하면 내게 죄가 없다거나, 법에 정한 만큼만 벌을 받겠다는 말이다. 법치주의의 요체는 후자에 가깝다. 즉 법의 집행에서 이중의 기준을 쓰지 않는 것이다. 법이란 것이 일관되게 집행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보편화되면, 사람들은 다른 길을 찾기 시작한다. 그것은 폭력이나 부패나 아부나 ‘떼법’이다.

당앙의 길과 상앙의 길, 어디로 갈 것인가? 당앙의 불행은 권력의 행사에 백성이 믿음을 가질 것을 꾀하기보다는 권력의 자의적 행사가 가져올 위화적 효과만을 노린 데 기인한 것이다. 일관성을 유지하라. 형정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단순한 언명에 코웃음치다가는 어느 날 권력자 자신이 당앙의 꼴이 될지 모른다.

<정인진 |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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