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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에 있는 서점 ‘이터널저니’에는 아이들이 보호자와 함께 책을 읽고 노는 공간이 따로 있다. 서점 한쪽 끝에 있는 환하고 깨끗하고 널찍한 독립적인 공간. 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는 서점 안으로 흘러들어오지 않았다. 그 공간이 궁금해 입구에서 훔쳐보았다. 아이들이 책을 읽는 모습을 바라보는 보호자의 눈빛은 따사로웠다. 행복해 보였다. 책이 주는 정서적 안정, 높아지는 지력, 감수성에 대한 신뢰를 어른 보호자는 갖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공간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다시 서점 안을 관찰했다. 서점 안의 독자는 무슨 책을 들춰보고 구매하는지 궁금했다. 날이 어둑해지도록 한참을 머문 서점 안에서 정작 책을 구입하는 독자는 드물었다. 어른도 정서적 안정, 지력, 감수성이 절실한데 말이다.

서점 창에는 뮤지션 존 레넌의 말이 원문과 함께 붙어 있었다. “내가 다섯 살 때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행복이 인생의 열쇠’라고 말씀하셨다. 학교에서 나중에 커서 무엇이 되고 싶은지 쓰라는 말에 나는 ‘행복’이라고 적었다. 그들은 내가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그들이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책 읽는 일은 미래가 행복해지는 길이다, 라고 말 한마디 꺼내면 요즘 정서로는 ‘따분하고 답답한 사람’ 취급한다. 

김연수 작가는 산문집 <시절일기>에서 장래 희망이 ‘할머니’라고 밝혔다. 103세 할머니 알리스 헤르츠좀머의 말에 깊은 인상을 받은 뒤 희망을 굳혔다는 것이다.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지극히 아름답지요. 그리고 늙으면 그 사실을 더 잘 알게 됩니다.” 나치수용소를 다녀온 이 할머니의 다음 말은 작가뿐만 아니라 독자인 내게도 소망을 품게 한다. “나는 악에 대해서 잘 알지만 오직 선한 것만 봅니다.” 웃는 눈으로 선한 것을 본다는 것. 슬픔과 절망의 소용돌이 같은 현실 세계에서 그런 선한 것을 알아보는 눈을 갖는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원대한 장래 희망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시골에서 올라와 한 칸 방 구하던 청년 시절의 작가는 남산타워가 보이는 지점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 서울에서 누군가는 천국에라도 온 것처럼 기뻐하고 누군가는 지옥에 떨어진 죄인처럼 괴로워할 테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남산타워는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대한 눈동자처럼 서 있었기에. 인생이 여행이라도 되는 양, 짐짓 여행자처럼, 모든 기쁨과 고통을 바라보는, 그러나 더없이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눈동자로, 그런데도 때로는 그 눈동자를 흉내 내는 것만으로 위로받는 경우가 있다”라는 고백.

행복, 선함이라는 가치를 강조하고 인생을 여행자처럼 사는 태도에 대해 비판적으로 할 말이 넘친다. 세상이 더 나아지고 있다는 믿음이 희박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눈앞에 있는 현실에서 너무 추상적이고 안이한 추구를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아름답게 늙어가고 죽음을 잘 받아들이라는 책들이 늘어나고 그것을 찾는 독자가 있다는 것은 중년이 넘어서도, 아니 인생의 어느 순간에도 장래 희망을 물을 필요가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지금 나에게도 장래 희망이 있다. 김연수 작가가 할머니를 희망했듯이 나는 할아버지를 희망한다. 늘 80세 현역 편집자 할머니를 꿈꾼다고 말했던 나는 &lt;디터 람스&gt;라는 영화를 본 이후에 이런 할아버지도 좋겠다고 희망했다. 세계적인 산업디자이너 디터 람스는 간결하고 단순한 디자인, “적게, 그러나 더 낫게(Less, but better)”를 추구한 일생을 살았다. 이제 아흔 가까운 나이에 그는 50년 동안 산 집에서 고요하게 여전히 자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는 “하나의 제품만을 디자인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세상을 디자인하고자 했다”며 ‘세상에 이로운 일’을 한다는 철학을 고수하고 있다.

장래 희망이 행복이든 할머니든 할아버지든 우리는 스스로 묻고 답하고 실천해야 한다. 현실을 살아도 남은 날들은 어떤 꿈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서점에서 내가 만든 책을 펼쳐 보는 독자를 발견하면 나의 일이 세상과 직결된다는 의식이 새삼 호출된다. 저 독자는 책에서 어떤 꿈을 보았을까. 그러고 보면 출판이 하던 일을 계속하기만 해도 세상에 도움이 되는, 장래 희망을 따로 마련하지 않아도 좋은 직종이어서 다행이다. 나는 매일 사소하고 현실적인 결정을 하지만, 그 사소함이 쌓여 세상에는 더 많은 장래 희망이 생겨날 것이다. 저 독자가 책을 읽고 지식을 얻거나 감동해서 한 발이라도 행복한 삶에 다가갈 거라고 믿기에 나는 오늘도 일할 수 있다. 그리고 장래를 희망할 수 있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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