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가 특정되었다. 지목된 이는 다른 성폭력·살해 사건으로 교도소에 이미 수감된 사람이다. 10명이라는 피해자 숫자와 불특정성, 살인 수법의 잔인성 등으로 당대에 드리운 공포와 불안의 그림자가 짙었고 ‘미제(未濟)’가 남긴 사회적 트라우마 또한 깊었던 사건이기에 반가움과 안도감, 새삼스러운 공분, 한편으로 제기되는 의구심 등 다양한 감정이 표출되고 있는 것 같다. 세간의 관심은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나뉜다.

먼저 ‘그는 누구인가’류다. 내성적 성향을 지닌 모범수’로 알고 있던 범인은 사실 알고 보면 타인에 대한 ‘극도의 증오감’을 지닌 ‘희대의 살인마’다. 겉으로는 순하지만 참을 수 없는 폭력적 ‘충동’을 지닌 ‘그 놈’은 ‘성도착증 환자’이기도 하다. 속내를 알 수 없는 ‘통제 불가능한 괴물’은 증폭되는 호기심만큼 점점 그 몸집이 커지는 중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9월20일 (출처:경향신문DB)

두 번째는 ‘왜 30여년간 잡히지 않았나’류다. 과거 수사의 한계와 오늘날 발달된 과학수사를 비교하기도 하고, 수사상의 각종 문제점을 짚으며 경찰의 무능함도 타박한다. 온갖 수사기법 관련 전문가적 지적과 제안이 난무한다. 어김없는 발전 맹신주의가 수치스러운 과거를 마구 짓밟는 사이, 반드시 도래해야 할 미래는 장밋빛으로 채색된다.

세 번째는 ‘왜 하필 이 시기에’류다. 혼란스러운 정국에 화성 사건이 ‘갑자기’ 드러난 건 ‘좌파 정권의 조국사태 물타기’며, 정부·여당, 언론이 공모한 결과물이다. 관심사는 화성 연쇄살해사건도, 경찰이 범인을 색출하는 과정도 아니다. 그저 우리·그들의 입지와 믿음을 확증할 수 있는 도구인지, 아닌지 여부다.

흥미롭게도 이 가운데 여성에 대한 연쇄살해사건이라는 문제의 본질은 무대 뒤로 사라진다. 살인처럼 극단적인 범죄의 경우 특수한 개인적·심리적 요인이 중요한 것도 사실이다. 30년 넘게 해결되지 못한 끔찍한 사건을 향한 국민적 관심이 경찰 수사의 한계에 대한 질타와 새로운 가능성 제시로 이어지는 것 또한 당연하다. 정치권에 대한 시민들의 실망과 의혹제기 또한 불합리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여성살해’의 속성과 배경에 대한 단합된 침묵과 무시는 기괴할 정도다.

(출처:경향신문DB)

통상 연쇄살인은 한 사람에 의해 시간과 장소를 넘나들며 다수의 대상에게 저질러진 살인사건으로 피해자들 간 관계성이 모호하고 범행을 통해 가해자가 물리적 이익을 취득하려는 목적 또한 불분명한 사건에 붙이는 이름이다. 이런 점에서 화성 사건은 명백히 연쇄살인사건이다. 그렇다면 왜 가해자는 남성이고 피해자 10명은 모두 여성인가? 그 ‘충동’의 실체는 오롯이 한 개인의 신체적·심리적 성향에 기인한 것인가? 그의 ‘증오’는 왜 일관되게 여성에게 향했는가? 유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1970년대부터 페미니스트들은 젠더폭력의 가장 극단적 형태로 남성중심사회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여성살해, 즉 페미사이드(femicide)에 주목해 왔다. 페미니스트 학자 러셀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을 살해하는 남성의 범죄”라고 정의하고, 성희롱, 각종 물리적·정신적 폭력, 강간, 성적 착취, 성노예 등 여성을 향한 테러의 연속선상에서 볼 것을 주문한 바 있다. 페미사이드는 크게 (전·현) 남편이나 남자친구, 동거남 등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살인과 낯선 자에 의해 발생하되 주로 성적인 공격과 관련된 살인이라는 두 가지 형태가 주를 이루나, 명예 살인이나 지참금 살인 등 특정한 문화적 관습으로 발생하는 살인은 물론 영아 살해, 선택적 낙태도 포괄한다. 형식 또한 개인에 대한 살해, 집단적 살해, 개인에 대한 연쇄적 살해 등이 있다. 문제는 실제 많은 사회에서 직접적인 억압뿐 아니라 간접적인 공포와 불안을 통해 여성을 지배·통제하는 도구로서 여성살해가 활용되어 왔고, 지금도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페미사이드를 해석 불가능한 정신이상자이거나 ‘변태’, 반사회적 괴물에 의해 발생하는 특수한 범죄가 아니라, 가부장적 역할·가치·욕구·힘의 규칙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남성 지배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필연적’ 결과물 중 하나로 보고 있다. 여성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과 멸시, 차별적 구조와 연관되기에 가해자의 뚜렷한 의도가 심문되지 못하는 이유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은 여성혐오와 여성살해라는 관점에서 재고되어야 한다. 관습적 용어와 해석에서 벗어난 새로운 언어와 상상력은 2016년 이후 많은 한국 여성들이 이미 충분히 제공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여전한 무지와 의도적 무시로 일관할 때 가해자는 결코 포획되지도, 감금되지도 않을 것이며, 소란스러움이 또 다른 소란스러움으로 대체되는 수준으로 ○○살인 사건은 지속되고 봉합될 것이다. 체계적인 접근과 총체적인 관점, 이에 기반한 사건의 진실규명이 절실하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